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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토일 Mar 21. 2024

어머니의 된장국

(feat. 우리엄마는 생태찌개)

 1.

 대학로에 연극센터가 개관하던 해에 나는 한예종 극작과 실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실기 주제는 보이체크를 읽고 독후감 비슷하게 쓰라는 거였는데 (게오르그 뷔휘너의 작품을 나는 왜 게오르그 루카치라고 기억하는지?) 파랗고 얇은 책이었던것 같지만 내 서재 어딘가에 짱박혀 있어서 찾기 귀찮다.


  그때 연극을 한답시고 정확히 극작을 배워보겠다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로 고시원에서 지냈다. 그 고시원에 처음 가서 놀란 것은 좁은 샤워실도 샤워실이지만 창문을 열면 건너편 주택의 현관문이 보인다는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면 불투명 유리너머로 스트립이 펼쳐지는 야경은 어떤 것일까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맥도날드 건물 지하인가, 그 옆 건물 지하인가에 마트로 가서 닭의 슴가를 사와 우유와 카레에 재워 그럴싸한 첫 음식을 해먹었다. 정확히는 내 자취의 첫 음식.


 공장에서 일하고 번 돈 200만원인가를 들고 올라와서 대학로라는 장소를 고른 이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쓰던 시가 아닌 극작을 고른이유는 O교수님 때문이었다. 사제라고 부를 만한 인연들에게서 어떠한 사제다운 조언을 얻은 것이 대학때가 처음이었는데, "네 불우하고 음울한 성장과정이 네 글쓰기의 자양분이 될거다" 라는 말을 나는 지금도 새기고 있다. 아무튼 교수님은 내가 교수님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잘해주셨다. 연극 티켓이 생기면 나를 불러 꼭 티켓을 챙겨주셨다. 그래서 지방에 살지만 대학을 다닌 2년동안 대학로에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왠지 극작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혔고 마치 궁극적으로 시를 쓴 것, 내 인생의 숱한 힘듦이 그것을 위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마칠 즈음에는 방송사에까지 나를 추천해주었다. 그러나 면접을 마치고 술자리라며 가진 것은 술면접이었고 만취한 채 갓길에서 잠들어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때를 정말로 후회한다. 21살에게 술을 먹이고 술버릇으로 면접을 보는 20년 전의 상황에 대해 참작하더라도 내 술버릇은 엉망이었으니까. 만취상태의 술버릇으로 꽤나 오랜시간 애를먹고 살아온 인생의 삼분의 일을 후회로 보냈는데 사실 아직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있다.


  내가 그 방송사 면접에 떨어지고 교수님 뵐 면목이 없어서 엉뚱하게도 서울을 간다고 공장엘 들어갔고 서울살이 1년 남짓 됐을 때 한예종 입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일과는 맥도날드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상수에 있는 독립서점 같은데를 떠돌아 다니거나, 광화문 교보에 가서 책을 좀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연극센터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어느날엔 연극 관람료가 모이면 좋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가기도 했다.





2.

 내 흥미를 끄는 것은 인디라고 써진 것이었는데 미로스페이스에서 하던 영화제 같은 것들이 주로 그랬고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같은 인디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연이 그랬다. 내 취향적인 것은 대부분 그때 완성이 됐다고 보여진다.  


 그러다가 나는 무료 관람이라고 써진 어느 허름한 극장앞을 지나갔고 연극 한편을 보게됐다. 내 인생의 최악의 연극이었는데 그 연극을 계기로 학을 떼고 시야에서 연극이란 것은 아예 치워버릴 심산으로고시원까지 한성대 입구역으로 옮겨버렸다. 그 연극은 내용이나 극본도 최악일 뿐더러 분명히 무료라 써진 관람이었지만 관람전에 모금함을 무대위에 둔 것이 히트였는데 달력 뒷면에 매직으로 갈겨쓴 모금함이라는 조악한 글씨와 무대조명 아래 덩그러니 놓여진 모금함의 그림자를 지금도 잊을 수 가 없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생계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것 같다. 내가 가진 꿈의 초라함과 동시에.


꿈이나 이상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꿈이라는 허상이 만들어낸 고인 빗물의 악취랄까.

사실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나는 극작을 한답시고 한량처럼 대학로를 떠돌아 다녔을 뿐이니까.


 한예종 입시는 당연히 떨어졌다.

면접까지 갔지만 면접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시종일관 자조섞인 태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내 스물 셋 겨울의 일이다.


 그때 내가 자주 듣던 노래가 어머니의 된장국이다. '담백하고 맛있는 그 음식이 그리워'.  나는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존심때문에 2년 8개월을 더 버텼는데 허송한 세월이었다.  그래서 그 노래만 들으면 나는 슈렉색깔 가디건을 입고 일하던 맥도날드 매장이 생각나고 4번출구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올때 보이는 풍경이 생각나고, 마로니에 공원의 겨울 풍경이 떠오르면서 설레임과 패배감이 동시에 밀려와 멀미가 난다.  


 그때의 불꽃이 내 안 어딘가에 사그라들어 있다가 불씨가 튀듯 뜨거운 것이 아직도 일렁이는 것을 지금은 관망할 뿐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종종 이 노래를 찾아 들으려다가도 유령처럼 대학로를 떠돌던 부끄러움이 또다시 밀려와 허우적대고나면 한바탕 기운이 쪽 빠진다. 진창을 허우적대다가, 꿈의 언저리를 서성이다가 이제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나이와 상관없이 또 부모란 존재가 보고싶은 것은 왜일까. 별로 살갑지도 달갑지도 않은 모녀관계를 반추했을때 더욱이 그러한데, 왜 나는 겨울도 아닌데 엄마가 끄린 생태찌개가 땡기는 걸까. 그때 먹은 술이 깨려나 보다. 인생 일장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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