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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Apr 03. 2024

다리가 허락할 때까지

도보중독자의 초심으로

어느 날 누군가 내 SNS 피드를 보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도 꼭 여행 다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 적이 있다. 코로나 시국이 정리되고 이런저런 제한이 풀리고 나니, 전에는 그냥 흘려 넘겼던 항공사 뉴스레터를 한참 쳐다보고 목적 없이 에어비앤비를 방황하며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그 말이 떠올라 큰 욕심 없던 지난날 소박했던 여행의 기록을 꺼내보았다.


꼭 해외까지 다녀오지 않아도, 가까운 곳이라도 집을 떠나 잠시 쉬고 오는 것도 나름 괜찮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대단한 것 없어도 그저 평소와 다른 곳에서, 익숙하지만 어딘가 조금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오는 것이 나의 여행이라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봇물 터지듯 올라오는 해외여행 사진들을 보면 없던 역마살도 낄 것 같은 기분이다 (하여튼 SNS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 몇 년 간의 여행 사진들을 훑어본다. 팬데믹 동안에는 역시 제주도를 가장 많이 찾았다. 섬의 서쪽 테두리에서 서너 번의 여름휴가를 보냈다. 지인이 알려준 제주시 한경면의 숙소를 주로 이용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자리한 1인용 숙소라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나 노래로 많이 알려진 애월읍에서 서쪽으로 한참 더 가면 있는 한경면은 최근에 소소한 음식점이나 카페, 소품 가게들이 하나씩 생겨나는 곳이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요 관광지들보다는 그런 소박한 동네가 왠지 나에게 잘 맞는 것 같다.


보통 제주도는 렌트가 필수라고 하지만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다. 무작정 걷고 또 걷고, 가끔 버스도 타고……. 휴가 한 번 다녀오면 평소에는 하루 평균 3천 보를 겨우 넘는 걸음 수가 1~2만 보는 우습게 넘는다. 따로 산책 시간을 정해 놓는다기보다, 목적지와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아놓고 그사이 이동하는 시간을 내내 걷기로 채워 넣는다. 지도를 검색했을 때 도보 40분 이내 거리라면 걷는 쪽을 택한다. 그러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풍경과 인상들은 차로 다닌다면 거의 놓치게 될 것들이다 (라고 메모해 놓았지만 사실 장롱면허라는 것이 결정적……).


산책이라는 말도 왠지 거창해서, 그저 하염없이 걷고 그 길에서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랄까. 가끔은 혼자 걷기 적적하여 듣던 음악이 그날 걷던 시골길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 평소에는 귀찮아서 하지 않는 플레이리스트 만들기도 한 번씩 해보고, 길가에서 마주친 멍멍이와 야옹이들과 눈인사도 나눠보고 (예민한 애들한테 버럭 호통도 당하고), 물가에서 휴식 중인 새들과 촉촉한 날씨가 반가워 나들이 나온 달팽이 친구와 내적 친밀감도 느껴 보고……. 맑으면 맑은 대로, 비 오면 오는 대로 적당한 날씨와 제주도 특유의 낮은 돌담, 누군가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싶었는지 신기한 모양으로 자라난 나무, 탁 트인 하늘, 현실감 없이 선명한 노을, 그저 순간의 색감이 좋아 담아둔 별것 아닌 풍경에서 행복을 느꼈던 기록을 꺼내본다.


여행이라는 것이 꼭 그리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했었는데, 괜히 남들과 비교하며 여기저기서 불어넣는 바람에 휘둘리다 보니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도 잠시 흔들렸던 것 같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고속버스를 예매한다. 이번 주말에도 하루 1만 보 돌파를 예상하며 (다리가 허락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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