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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나무 Jan 12. 2024

울음으로 말하기

병원 벤치에서

몇 년 전 나는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꾸준히 추적검사를 해야 해서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이번에는 혈액검사를 해야 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전날 밤 10시부터 금식을 하고, 약 3시간이 소요되는 서울 병원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버스를  타고 서울 병원으로 향한다. 1시 30분 예약인데 혈액검사를 위해 오전 10시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검사를 위해 접수대로 갔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고 검사하러 왔다고 하니, 오늘은 사전 검사가 없단다. 응? 없다고? 난 문자를 받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받은 문자를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당황하는 눈동자가 나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향한다. 그러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하곤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렇게 한 5분을 대기시키더니 나를 부른다. 문자가 잘못 전송된 것 같다고, 오늘 검사가 없으니 오후 예약시간에 맞춰서 다시 와서 대기하란다.


"응? 뭐라고요? 문자발송오류요?"


그럼 난 무엇을 위해 금식을 했으며, 새벽 일찍 일어나 잠도 덜 깬 나를 데리고 버스에서 졸아가며 검사시간에 늦진 않을까 지하철에 내려서도 종종걸음으로 병원에 도착했건만! 이 모든 행동이 무의미한 몸짓이 되어 버린 순간이다. 욱하고 화가 났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참았던 갈증에 목이 아우성치는듯했다. 집에서부터 챙겨 온 아이스커피가 생각나니 더욱 갈증이 심해졌다. 그리고 병원건물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짧은 통로를 떠올리며 나를 재촉했다.


지금 필요한 건 스피드! 5분 정도 지나자 출구의 회전문이 보인다. 밀고 빨리 나가려 문에 손을 대려다 '손대지 마시오!' 경고문 보며 흠칫 놀라 몸이 뒤걸음 친다. '아~회전문은 왜 이리 늦게 돌아가는 거야!' 몇 초의 시간이 몇 분 같이 느껴진다.  드디어 병원 건물 밖이다!! 마스크부터 벗어던지고 단숨에  500ml 아이스커피를 흡입한다.


'아! 이거지!'


문자발송오류에 금식으로 물도 마시지 못해 갈증으로 기운이 없던 내 몸을 아이스커피로 깨웠다. 화도 내지 못하고 흥분한 체 돌아섰던 나를 진정시키니 명약이 따로 없었다.
 



  이제 진료까지 2시간 반이 남았다. 시간이 붕 떴다고 해야 하나, 생겼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는 그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책이나 보면서 일광욕이나 할 요량으로 햇살 좋은 나무 아래 벤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마스크를 벗고 쉬려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몇몇 보인다.


5월, 시간은 봄과 여름 사이, 중간 어디쯤으로 달려갔다. 한창 물이 오른 나무는 햇살을 받아 연둣빛보다는 진하지만 초록은 아닌 반투명한 잎을 드려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늘이 반, 햇살이 반 들어오는 벤치에 간간이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외투도 벗어 걸쳐 둔다. 본격적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 내려간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왼쪽 벤치에 자리 잡는다. 백일도 안 돼 보이는 아기의 볼은 못난이 장난감 아기인형처럼 태열로 빨갛다. 머리카락도 별로 없는데 제 멋대로 삐죽 서있는 것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다시 책을 읽는다.


그리곤 얼마 되지 않아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유모차에 누워있던 아기가 목놓아 운다. 엄마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왜 울어? 넌 분유도 먹었잖아. 이제 자면 되는 데 왜 울어? 엄마는 밥도 못 먹었어"라며  큰소리로 아이에게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대답도 못하는 아이에게 계속 불만을 토로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운다. 벤치의 한 여성이 목놓아 운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엉엉 운다. 심지어 여성이 오기 한참 전부터 혼자 앉아있던 남성은 그 모습을 한창 바라본다. 그러더니 점퍼 주머니에서 길에서 교회 홍보용으로 나눠준 일회용 화장지를 무심히 여성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둘은 아는 사이였을까?)



아이도 여성도 왜 우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울음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말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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