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에 개봉한 영화 소울(soul). 코로나 상황 때문인지 픽사 영화치고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러나 인사이드 아웃과 비슷한 톤의 심리 영화로 삶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상담에서도 대단히 큰 위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기력하거나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추천하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고등학교 음악 교사인 조 가드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를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 재즈 밴드에 합류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맙소사!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바닥의 맨홀에 빠져 사고가 난다. 죽음의 세계(The Great Beyond)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선 조가 아등바등하며 빠져나온 곳이 탄생 전의 세상(The Great Before)이다. 그곳에서 조는 어쩌다가 '22'라는 영혼의 멘토가 된다. 멘토는 영혼을 길러서 지구로 내 보내게 되는데, 하필 22는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시니컬한 영혼이다. 둘의 좌충우돌 여행을 통해 조와 22는 각자 변화를 겪게 되며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사실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의 현재 상태에 따라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고 너무 뻔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로 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잘 만든 영화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인생의 진리이지만 우리가 흔히 놓칠 수 있는 것을 절묘하게 잘 형상화하고 스토리에 적절히 녹여냈다. 삶의 의미를 몰라 방황하고 있고 이유 없이 무기력이나 우울을 느끼는 사람들이 보고 너무 감동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영화의 스토리텔링 속에서 느낀 감상 포인트 몇 가지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시간 순서로 쓴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이해가 더 쉬울 듯하다. 스포 범벅 주의!)
1. '현재를 살라' 즉,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이 영화의 큰 메시지는 '현재를 살라'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목표를 추구하며 일상의 소중한 경험을 소홀히 한다. 영화의 주인공 조 가드너 역시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좇아 일상을 경시하게 된다. 자신은 재즈 연주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굳게 믿으며 그 열정을 불태우지 못해 늘 아쉬워하며 초조해한다. 무언가에 열정을 갖는 것 그리고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목표에 대한 열정도 활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모두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목표만 추구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사는가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도 된다.
반면 우연히 조 가드너의 몸으로 세상에 나온 22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햇빛 아래로 살랑살랑 떨어지는 나뭇잎, 달달한 사탕, 짭조름하고 고소한 피자, 지하철의 사람들... 22는 순간순간을 경험하며 그런 물건들을 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챙겨둔다. 이후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조 가드너는 22가 남겨둔 물건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다. 자신이 꿈을 좇느라 놓쳐왔던 일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말이다. 그리고 환희에 차서 일상의 기쁨을 표현하는 음악을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2. 삶에 뛰어들다!
탄생 전의 세상에서는 통행증이 생겨야 지구로 갈 수 있다. 통행증의 마지막 불꽃(spark)이 관건인데, 22는 이 불꽃이 도무지 생기지를 않아 지구로 가지 못한다. 난다 긴다 하는 위인들이 22의 멘토였지만 22의 불꽃을 만들어주는데 모두 실패했다. 각자에게 있어 열정을 쏟을 재능이 바로 그 불꽃이라고 생각한 조 가드너는 22의 재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 역시도 조 가드너의 시선으로 그 열정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불꽃의 실체를 듣고 머리를 한방 맞은 듯했다. 그 불꽃은 살 준비가 되면 생기는 것이었다. 22는 태어나는 것에 대한 저항을 갖고 있었기에 통행증에 불꽃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명이들이 통행증을 받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구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달리 보였다.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드는' 모습이 형상화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태어난 것이 내 선택이 아닌 우연 발생적인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내가 살 준비가 되어 삶에 뛰어들기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열정이나 재능이라는 것도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에 뛰어들어 발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3. '무아지경'과 '집착/ 중독'은 한 끗 차이
이 영화에서 좋았던 점 중 하나가 the zone에 대한 표현이었다. 영화에서는 뭔가에 중독되고 집착하는 상태를 the zone에 가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있는 상태로 어둡고 칙칙한 세계이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이 존(zone)에서 떠돈다.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슬프게 떠도는 한 영혼을 잡고 보니 그는 주식 딜링룸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딜러였다. 기계적으로 매매에 몰두하고 집착하다 보니 영혼이 분리되어버린 것. 마약이나 게임에 중독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표현도 흥미로웠지만, 더 흥미로웠던 것은 무언가에 몰입해있는 무아지경의 상태도 이 존(zone)에 가있는 상태로 형상화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 세상 텐션이라고 할 때 저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튼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몰입(flow)나 그로 인한 무아지경의 상태도 정도가 심하면 집착이나 중독과 같은 상태라는 것은 나에게 굉장한 깨달음을 주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무아지경과 집착은 한 끗 차이인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조 가드너를 보니 더 와닿았다. 조는 재즈에 열정적이었지만, 너무 깊게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있었다. 22의 영혼을 가진 조가 머리를 다듬기 위해 단골 미용사를 방문한다. 고양이의 몸속에 들어간 조와 함께. 늘 자기 이야기만 했던 조와 달리 22는 미용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미용사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머리 스타일링이 끝나고 조를 배웅하며, 미용사가 말한다. 오늘 대화가 너무 좋았다고 말이다. 조의 몸에 들어간 22는 물어본다. 그동안 왜 이런 이야기 안 했냐고.그러자 미용사가 하는 말, "그동안 네가 물어본 적 없잖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동안 조는 미용실에 가서도 어디에 가서도 재즈에 대한 자기 열정만 늘어놓았을 것이다. 무언가에 너무 깊이 빠지면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살게 된다. 집착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밸런스가 중요하다.
4. 외부의 비난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힘은 실존적 경험
지금- 여기에서의 나, 즉 실존을 사는 것은 목표에 대한 집착도 삶의 무기력에서도 벗어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실존적 경험의 위대함은 또 있다. 외부의 목소리와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힘이 된다. 그것을 형상화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작진 중에 실존주의를 깊이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자문을 한 것일까?
의도치 않게 세상을 경험하고 나서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 22. 탄생 전의 세계로 돌아온 22에게 마지막 불꽃이 채워져 통행증이 생기지만, 조 가드너는 자기의 몸으로 경험한 것이기에 그것은 자신의 통행증이라며 22에게 면박을 준다. 둘의 다툼 끝에 22는 자신의 통행증을 조에게 던져주고 사라져 버린다. 조는 통행증을 받아 들고 다시 살아 돌아오고 꿈에 그리던 멋진 재즈 연주를 마친다. 꿈을 이룬 듯 하지만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일상에 조는 허무함을 느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자기 주머니에서 발견한 나뭇잎과 사탕, 실괘 등을 보며 영감과 깨달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22에게 미안해진다. 22에게 사과를 하고, 지구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22를 찾으러 간다.
그런데 22는 the zone에서 괴물이 되어 버렸다. 자신은 삶의 목적을 찾지 못했다고 괴로워하며 떠돌아다닌다. 조를 발견하고 더 사나운 괴물이 되어 숨어버리는데, 조는 예전에 22가 간직했던 나뭇잎을 22의 손에 쥐어준다. 그러자 사나운 괴물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비록 짧은 장면이지만 이 장면에서 감탄했다. 조의 비난을 곱씹으며 괴로워하고 자책하던 그 마음, 두려움, 불안을 녹아들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도 아닌 실존의 경험이라는 것을 이렇게 잘 표현해낼 수가... 따뜻하고 영롱하게 빛나던 햇빛 아래 살랑이는 바람결에 춤추듯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고 느끼고 만지던 그러면서 감탄하던 그 경험, 그 실존의 경험만이 우리를 외부의 비난과 판단으로부터 지켜내 주는 것이 아닐까. 외부의 날 선 비난과 판단은 실체 없는 두려움을 낳지만, 오롯이 내 실존으로 경험한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다. 결국 실체가 있는 것은 실체 없는 것을 이긴다. 불안과 두려움이 높은 내담자와의 상담에서 상담자로서 중점을 두는 부분도 이것이다. 이 진리를 픽사 애니메이션은 너무나 멋진 방법으로 표현해냈다.
5. 두 번 죽게 되는 조 가드너..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다른 태도
영화에서 조는 두 번 죽음을 맞이한다. 한 번은 영문도 모른 채, 한 번은 준비된 죽음이다. 물론 준비된 죽음이란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죽음은 예기치 않게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의 두 번의 죽음 장면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첫 번째 죽음에서 조는 죽음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여한이 많은 삶이다. 반면 두 번째 죽음에서는 조는 편안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아직 젊긴 하지만 실존적 삶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이다. 여한이 없다. 그러고 보니 죽음으로 가는 계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된다.
운 좋게도 두 번째 죽음마저 유예되고 다시 살 기회를 얻게 되는 조, 어떻게 살 거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울림을 준다. "나는 매 순간을 살 거예요. (I'm going to live every minute of life.)"
덧) 한 친구가 두딸과 같이 봤는데, 아직 어린 둘째딸은 무서워서 엉엉 울다가 아빠 품에 안겨 나가버렸고 초등학생 1학년인 첫째달에게는 영화가 어땠냐고 물어보니 아이의 대답 "길 가면서 땅을 잘 보고 다녀야한다는 걸 배웠다"라고.... 이 영화는 분명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