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네요 1부

온기 - 함께 걷던 봄날

by 왈로비
1장. 테크법무팀

금요일 밤 아홉 시가 넘으면 알타 본사 11층은 낮과 다른 장소가 됐다.


낮에는 회의실 유리벽마다 사람이 붙어 있고, 복도 끝 폰부스마다 누군가 이어폰을 낀 채 손짓으로 설명하고, 메신저 알림음과 문 열리는 소리가 뒤섞여 층 전체가 얇게 울렸다. 밤이 되면 불이 절반쯤 꺼지고, 창가 자리들만 길게 살아남았다. 청소 로봇이 경계선을 더듬듯 움직였고, 카페에서 막 들고 올라온 커피 냄새가 공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법무실은 넓었다.

송무팀, 공정거래팀, 인사노무팀, 컴플라이언스팀, 지식재산권팀. 그리고 언제나 가장 늦게까지 불이 남아 있는 테크법무팀.

플랫폼, 인공지능, 개인정보, 신사업. 회사가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문제들이 먼저 와 앉는 자리.


그날도 끝까지 불이 켜져 있는 건 그 팀 자리뿐이었다.


한주원은 화면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한번 눌렀다.

모니터에는 해외 클라우드 업체 표준계약서가 떠 있었고, 노란 표시가 세 군데나 찍혀 있었다. 해외 업체가 한국 이용자 데이터를 맡아 처리하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다른 협력사에 다시 일부 맡길 수 있다는 재위탁 조항 때문이었다. 서비스기획팀은 “다들 이렇게 합니다”라고 했고, 인프라팀은 “이 조항 빠지면 일정이 밀립니다”라고 했고, 개인정보보호 담당자는 “고지만 조금 더 두껍게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서비스는 늘 빨리 열리고 싶어 했고, 책임은 늘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 했다.


주원은 모니터 옆 메모칸에 ‘재위탁, 국외이전, 사전동의’를 짧게 나눠 적었다. 한 줄로 묶어두면 꼭 나중에 설명이 길어지는 항목들이었다.


“이거 그냥 두면 나중에 복잡해질 것 같은데요.”


김해인이 모니터를 돌리며 말했다.


주원은 의자를 그녀 쪽으로 조금 밀었다.

해인의 손가락 끝이 화면 한 줄을 짚었다.


“이 조항대로면 해외 업체가 다시 다른 업체에 맡겨도 우리는 사전에 알기 어렵잖아요. 지금은 편해도 나중엔 관리가 안 될 거예요.”


주원이 다시 읽었다.

“맞아요. 재위탁이랑 국외이전은 따로 검토해야 하는데, 여기선 한 문장으로 묶여 있네요. 근데 여기서 너무 세게 막으면 개발팀이 또 일정부터 들고 올 텐데.”


“일정은 자기들이 얘기하는 거고, 나중에 설명하는 건 우리 일이잖아요.”


“그래서 문제지.”


“그럼 지금 막아야죠. 나중에 사고 나고 설명하는 것보다.”


주원은 웃었다.

“해인 씨는 문장이 너무 단호해.”


“한 변호사님은 너무 착하시고요.”


맞은편에서 김기현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계약서 앞에선 착하면 안 돼, 주원아.”


기현은 테크법무팀 팀장이었지만, 책상에 앉아 지시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회색 반팔티 위에 얇은 후드 집업을 걸쳤고, 발에는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먼저 회의실 문을 열고, 남은 커피를 치우고, 누가 저녁을 못 먹었는지 제일 빨리 보는 쪽. 팀장이 된 뒤에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문세희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며 웃었다.

“맞아요. 둘이 나중에 같이 로펌 차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기현이 물었다.


“주원이는 사업부나 사람들 사정까지 다 고려하고, 해인 씨는 결론부터 적으려고 하잖아요. 둘이 같은 사무실 쓰면 벽에 문장 던지면서 싸울 것 같은데.”


기현이 사내 카페에서 가져온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난 그 로펌에는 안 들어간다.”


세희가 바로 받았다. “나도. 너무 피곤할 것 같아.”


해인이 아주 잠깐 웃었다.


“그 정도면 로펌이 아니라 재난이죠.”


주원도 따라 웃었지만, 사실 웃음보다 먼저 해인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삼 년 전이었다.

그날도 법무실은 바빴다. 주원은 모니터에 거의 얼굴을 박고 있었고, 누군가 뒤에서 “신입 변호사들 인사 왔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도 대충 고개만 들었다. 멘토 변호사 뒤에 신입 둘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만 또렷했다.


진한 남색 스키니진. 흰 블라우스. 단정하게 묶은 포니테일.

과하게 꾸민 사람은 아닌데, 그날 법무실 형광등 아래에서 유난히 또렷해 보였다.

“김해인입니다.”

그 말을 듣고도 주원은 자리에서 한 박자 늦게 일어났다. 그 순간의 흰색과 남색, 그리고 목소리만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한 변호사님.”


해인의 목소리가 다시 가까이서 들렸다.


“네.”


“어디 다녀오셨어요.”


“삼 년 전쯤.”


세희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또 저런다. 한주원은 가끔 멀쩡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 해.”


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덜 심심하지.”


주원이 다시 계약서를 훑었다.

“좋아요. ‘재위탁 시 사전 통지 및 승인’ 문장 넣고, 처리 범위도 조금 더 구체화하죠. 국외이전 조항과는 분리하고.”


기현이 말했다.

“그걸로 가자. 일정 얘기 나오면 내가 처리할게.”


“오늘따라 되게 든든하네.” 세희가 말했다.


“오늘따라?”


“보통은 먹는 얘기부터 하잖아.”


“먹는 것도 팀 운영이야.”


기현이 그렇게 말하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해인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작은 알림창이 떴다.

사내 메신저와는 색부터 달랐다. 법무실 안에서도 몇 사람만 연결된 보안 비상 채널이었다.


해인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왜?”


주원이 가장 먼저 물었다.


해인은 대답 대신 창을 눌렀다.

어두운 로그 화면이 열리고, 영어와 숫자가 빠르게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있던 장난이 걷히고, 그 자리에 다른 종류의 집중이 들어왔다. 해인의 얼굴도 같이 바뀌었다. 장난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판단이 먼저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


기현이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어?”


해인이 창을 하나 더 띄웠다.


“이상한데.”


“뭐가.”


“해외 리전 관리자 계정 쪽에 비정상 접근 흔적 있어요.”


세희가 의자에서 바로 몸을 세웠다.

“장애는 아니고?”


“장애면 이렇게 안 남아요.”


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해인 옆으로 갔다.

문자열을 다 읽지 못해도 흐름이 잘못 꺾였다는 감각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플랜트 제어도면을 보던 시절부터 몸에 남은 감각이었다. 선이든 로그든, 이상한 건 늘 리듬을 깨고 들어왔다.


“고객정보 시스템이랑 붙어 있어?”


“가능성 있어요. 확정은 아직 못 하고요. 근데 이 경로는 정상 아니에요.”


기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야, 보안대응팀 바로 연결해. 안 받으면 책임자까지. 주원아, 실장님 쪽 먼저 알리고. 해인아, 계속 봐.”


“네.”


세희는 이미 전화를 들고 있었다.

주원은 휴대전화를 꺼내 법무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테크법무팀입니다. 해외 인프라 연동 시스템에서 비정상 접근 흔적 확인. 고객정보 영향 가능성 배제 어렵습니다. 현재 대응 중입니다.


메시지를 보내고도 그는 해인 쪽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샌드위치 얘기를 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하고 정확했다.


“한 변호사님.”


해인이 그를 불렀다.


“네.”


그녀가 아주 잠깐 그를 봤다.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맑았다. 맑은 것들은 대개 좋은 소식과 함께 오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커질 수도 있어요.”


주원은 손끝이 먼저 식는 걸 느꼈다.

진짜로 큰일이 생기면 사람은 표정보다 손으로 먼저 안다.


그날 밤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2장. 72시간

이상한 일은 언제나 “지금부터”로 시작하지 않았다.

누가 언제 처음 봤는지, 누가 그걸 사건이라고 인정했는지, 누가 그 시점을 나중에 설명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법은 대개 사고 자체보다, 사고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를 더 오래 물었다.


보안대응팀과 개인정보보호팀 담당자들이 회의실로 모여들자 공기가 금방 달라졌다.

원래 네 명이면 넉넉하던 유리 회의실이 순식간에 비좁아졌다. 화상회의 링크가 열리고, 노트북 여섯 대가 동시에 켜졌다. 누군가는 충전선을 정리했고, 누군가는 커피와 생수, 빵이 든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새벽이 될수록 모두의 옷차림은 더 편해졌고, 표정은 더 날카로워졌다.


잠시 뒤 대표이사 윤진한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킷은 팔에 걸쳐져 있었고, 셔츠 소매는 한 번 접혀 있었다. 뒤따르던 비서가 태블릿을 들고 있었지만, 윤진한은 먼저 벽 쪽 화이트보드를 봤다.


해인이 보드마카로 세 줄을 적어두었다.


1. 실제 유출 여부

2. 유출 범위

3. 국외 이전 정보 포함 여부


주원이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4. 언제부터 회사가 알고 있었다고 볼지


보안대응 책임자가 물었다.


“네 번째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주원이 마카를 내려놓았다.


“나중에 제일 오래 설명하게 되는 건 보통 그 시점입니다.”


개인정보보호 담당자가 보드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개인정보 쪽은 72시간 내 신고 아닌가요?"


주원은 잠깐 보드를 보다가, 오른쪽 구석에 숫자를 더 적었다.


24시간 / 72시간


주원이 말했다.


“72시간은 맞습니다. 개인정보가 실제로 유출됐다고 알게 되면 그때부터 통지하고 신고하는 시계가 돌아가니까요. 그런데 이번 건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외부에서 비정상 접근 흔적이 먼저 잡혔잖아요. 그러면 유출 여부만 볼 게 아니라 침해사고 축도 같이 봐야 해요. 우리처럼 서비스가 붙어 있는 건 해킹 신고가 먼저 돌아갑니다. 그건 24시간입니다.”


윤진한이 물었다.


“지금 우리 시계는 어느 쪽부터 갑니까.”


주원은 아주 짧게 답했다.


“둘 다 열어둬야 합니다. 다만 먼저 놓치면 안 되는 건 24시간입니다.”


누군가 낮게 말했다.


“시계가 두 개라는 거네요.”


“네.” 주원이 말했다. “나중에 실제 유출이 아니었다고 정리될 수는 있어도, 지금 단계에서 침해사고 신고를 늦추면 왜 바로 움직이지 않았는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윤진한은 보드를 잠깐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둘 다 열어두고 갑시다. 숨기지 않는 쪽으로.”


말이 끝나자 주원은 노트북 화면을 둘로 나눴다. 한쪽엔 정보주체 통지 초안이, 다른 쪽엔 침해사고 신고 초안이 떠올랐다. 그는 두 번째 창 제목을 먼저 확인하고 시간을 적었다.


알타 같은 회사의 밤샘 대응은 드라마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누군가 탁자를 치지도 않았다. 대신 더 피곤한 종류의 일들이 이어졌다. 로그를 보고, 다시 보고, 권한을 맞추고, 국외 리전 맵을 대조하고, 시간을 적고, 문장을 고쳤다. 사람이 밤새 무너지는 방식은 대개 이런 쪽이었다. 끝없이 정밀해지는 방향으로.


김해인은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더 정리되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정보보안 동아리에서 실전 해킹 대회와 보안 문제를 붙들고 밤을 새우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시스템이 흔들릴수록 말이 줄고 속도가 붙었다.


“여기 보세요.”


해인이 화면을 확대했다.


“관리자 계정은 맞는데 정식 로그인 흐름이 아니에요. 세션 토큰을 땄거나, 백업키를 건드렸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커요.”


“고객 데이터 쪽 조회 흔적은?” 주원이 물었다.


“있어요. 근데 반출은 아직 단정 못 하겠어요. 조회 패턴이 애매해요.”


“애매한 게 제일 피곤하네.”


“확실한 사고는 원래 이렇게 안 보여요.” 해인이 말했다. “처음엔 늘 애매해요.”


기현은 회의실 한쪽에서 다른 부서와 전화하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잘못했냐가 아니라 뭐가 나갔는지예요. 책임 순서는 나중에 정합시다.”


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가 공기를 한번 훑어봤다.

누가 버티고 있고, 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지 기현은 빨리 보는 편이었다.


“세희야, 문구 먼저 잡자.”


세희는 이미 노트북을 돌려놓고 있었다.

그녀가 맡은 건 정보주체에게 나갈 침해사실 고지 문구였다.

정확한 사실관계가 다 나오기 전까진 단정하면 안 되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아닌 문장이 되어선 안 됐다. 법적 표현이면서 동시에 사람 손에 먼저 닿는 문장. 세희는 이런 문장을 잘 썼다. 너무 차갑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게.


“‘고객님의 소중한 정보’는 빼요.”


세희가 말했다.


개인정보보호 담당자가 물었다.

“왜요? 보통 그렇게 쓰지 않나요?”


“그래서요.” 세희가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거슬려요. 평소엔 그렇게 말 안 하다가, 사고 나면 갑자기 소중하다고 하잖아요.”


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럴 때일수록 변명처럼 안 들리는 문장이 필요해.”


주원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변명처럼 안 들리는 문장.


“정보주체 문의에 답할 질문과 답변 정리본도 같이 만들어야겠어요.” 세희가 덧붙였다. “전화를 받는 사람마다 말이 다르면 더 불안해져요.”


“좋아요. 내가 뼈대 먼저 잡을게.” 주원이 말했다.


해인은 그 사이에도 계속 로그를 보고 있었다.

주원은 어느 순간부터 자꾸 그녀 쪽을 보게 됐다. 사람 마음은 늘 저런 데서 한 칸씩 움직였다. 모두가 지치고 있을 때 오히려 더 맑아지는 사람, 불안을 키우지 않는 말만 고르는 사람, 손을 떨지 않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사람.


새벽 두 시가 넘었을 때, 주원은 잠깐 회의실을 나왔다.

탕비실엔 아무도 없었다. 정수기 온수 버튼을 눌러 종이컵에 물을 받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해인이었다.


“안 졸리세요?”


“졸리죠.”


“커피 아니네요.”


“오늘 커피 너무 많이 마셨어요.”


해인이 아주 잠깐 웃었다.

“그럼 저도 물 마실래요.”


주원은 컵을 하나 더 꺼내 따뜻한 물을 받아 건넸다.

해인은 그걸 받아 손바닥으로 감쌌다. 정수기 안에서 다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네요.” 해인이 말했다.


“뭐가.”


“이럴 때 한 변호사님 있으면 좀 덜 무서워요.”


그 말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늦게 들어왔다.


주원은 컵을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해인 씨가 있어서 그런 거겠죠.”


해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모금 마셨다. 종이컵 가장자리에 아주 옅은 자국이 남았다.


아침 다섯 시가 넘어갈 무렵 윤곽이 나왔다.

비정상 접근은 있었고, 고객 데이터와 연결된 특정 영역에 조회 흔적도 있었다. 국외 리전 경유 정황 때문에 신고는 보수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대규모 반출까지는 아직 단정할 근거가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아직 모르는 게 남아 있었다는 뜻이었다.


윤진한이 물었다.

“지금부터 회사가 해야 할 건.”


주원이 답했다.


“숨기지 말고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설명할 수 있게 판단 과정도 다 남겨야 합니다.”


윤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대로 갑시다.”


그날 낮 회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다시 움직였다.

점심 약속도 있었고, 회의도 있었고, 다른 메일도 계속 들어왔다. 회사는 늘 큰일을 작은 일들 사이에 숨기며 버텼다.


하지만 네 사람은 알고 있었다.

밤을 같이 새운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시간이 있다는 걸.


그날 이후로, 일이 꼬이면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부터 찾게 됐다.

누가 먼저 로그를 붙잡고, 누가 문장을 세우고, 누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지 이미 한 번 다 본 뒤였기 때문이다.



3장. 봄날

주원과 세희는 입사동기였다.

처음부터 유난히 친했던 건 아니지만, 몇 번 같이 늦게 남고 몇 번 같이 점심을 먹고 나면 원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말하게 되는 종류의 사이. 세희는 주원이 말을 고르다 자꾸 멈추는 걸 빨리 알아챘고, 주원은 세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 상태를 먼저 읽는 버릇을 일찍부터 알았다.


해인이 팀에 온 뒤엔 리듬이 조금 바뀌었다.

로스쿨 기수나 입사 시기, 나이 같은 건 생각보다 오래 남지 않았다. 서로를 더 빨리 가까워지게 한 건 같이 늦게 남아 있던 밤들이었다. 처음 한동안 해인의 말에는 조심스러운 높임말이 먼저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반듯한 말들 사이로 조금 느슨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일 얘기를 할 때는 여전히 단정했으나, 밤이 깊어지거나 회사 밖으로 나오면 문장은 조금씩 짧아졌다.

그게 자연스러워질 무렵이었다.


점심은 대개 넷이 같이 먹었다.


“아무 데나 가죠.”


주원이 말하면 해인이 바로 받아쳤다.


“그 말 제일 믿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왜.”


“한 변호사님은 아무 데나라고 해놓고 꼭 마지막에 마음 바꾸시잖아요.”


세희가 웃었다.


“맞아. 지난번에도 곰탕 먹자더니 식당 앞에서 갑자기 돈까스로 바꾸자고 했잖아."


“그건 순간적으로 마음이 바뀐 거지.”


“그걸 변덕이라고 해.”


기현은 늘 메뉴보다 자리를 먼저 봤다.

넷이 바로 앉을 수 있는지, 줄이 얼마나 긴지, 회의 전에 빨리 먹고 나올 수 있는지.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물컵을 채워오고, 자리를 먼저 잡아두는 쪽이었다. 말은 많지 않아도 손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그런 건 대개 오래 남았다.


점심 다음엔 산책이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사 들고 건물 뒤편 은수천 쪽으로 내려가는 날이 많았다.

은수천은 크지 않았지만 계절을 아주 정직하게 보여줬다. 봄이 오면 양쪽 둔치에 벚꽃이 천을 따라 길게 붙었고,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꽃잎이 물 위로 한꺼번에 흘렀다. 해마다 짧은 며칠 동안만 세상이 엷은 빛 안에 놓였다.


그해 봄, 네 사람도 은수천을 자주 걸었다.

기현은 은수천 둔치를 잇는 작은 다리 한가운데서 “여기 진짜 잘 나온다” 하고 휴대전화를 들었고, 세희는 또 사진 찍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제일 먼저 포즈를 잡았다.


벚꽃 아래 선 해인은 이상하게도 더 조용해 보였다.

분홍빛이 사방에 번져 있는데도, 그녀는 그 안에서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이 불 때마다 어깨에 붙었다 날아가는 꽃잎 때문에 더 선명해졌다.

해인은 카메라를 향해 크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사진 찍는 동안 아주 잠깐, 웃기 직전의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은 늘 사진보다 기억 쪽에 더 오래 남았다.


나중에 그날 찍힌 사진을 다시 보면, 먼저 들어오는 건 벚꽃도, 한 프레임 안에 선 네 사람 전체도 아니었다. 주원의 시선은 늘 이상하리만치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멈췄다.


세희가 어느 날 은수천 다리 위에서 물었다.


“우리 팀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뭔지 알아?”


기현이 대답했다. “회의?”


“아니. 걷는 거.”


해인이 웃었다.

“왜요?”


“우리 팀은 하루 종일 걷잖아. 회의실 갔다 자리 갔다, 제품팀 갔다, 인프라팀 갔다. 결국 자문도 사람들 사이를 몇 번 오가고 나서야 겨우 모양이 잡히는 거지.”


주원이 말했다.


해인이 아주 가볍게 받았다.


“한 변호사님은 가끔 그런 말을 하잖아요. 그게 기억나요.”


주원은 괜히 웃지 못했다.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그렇게 쌓였다.

점심 메뉴를 두고 실랑이를 하다가, 누가 늦으면 먼저 주문을 해놓고, 누가 말이 적어지면 굳이 먼저 묻지 않고 한 바퀴 더 걷고. 회사는 여전히 회사였지만, 그 안에서만 생기는 종류의 생활이 있었다.


그 무렵 기현이 결혼을 했다.

예식은 가까운 사람들만 부른 작은 야외 결혼식이었다. 6월 초의 공기는 부드럽게 따뜻했고, 연둣빛이 아직 남은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주원과 세희, 해인도 그 다정한 오후를 함께 보고 있었다.


신랑 대기실에서 본 기현은 회사에서 보던 얼굴보다 조금 덜 단단했다. 늘 제일 먼저 팀을 챙기던 사람이 자기 일 앞에서 잠깐 어색한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은 진짜 팀장님 얼굴 아니네요.” 세희가 말했다.


기현이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무슨 얼굴인데.”


“오늘은 그냥 신랑 얼굴.”


해인은 코랄빛 튤립과 피치색 거베라 사이로 초록이 부드럽게 번진 꽃장식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표정이 제일 좋네요.”


“내가?”


“네. 회사에서 보던 얼굴이랑 완전 다르잖아요.”


기현은 웃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주원은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얼굴을 하나 더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은 조금 다르게 남았다.


식이 끝나고 네 사람은 잔디 가장자리로 나와 잠깐 함께 서 있었다. 햇빛은 나무 사이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다른 하객들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남기며 천천히 지나갔다.


“이제 진짜 가는 거네요.” 세희가 말했다.


“어디를.” 기현이 웃었다. “집으로?”


“그쪽 세계로.”


“무서운 말 하지 마.”


해인이 기현을 보고 말했다.


“잘 어울려요.”


“뭐가.”


“오늘 같은 날이요.”


기현은 멋쩍게 웃었다.


그날 이후에도 팀의 일상은 계속됐다.

다만 회사 밖의 기억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해인과 주원은 점점 더 자주 마지막까지 남았다.


어떤 날은 신규 서비스 출시 검토 때문에, 어떤 날은 개인정보 흐름 정리 때문에, 어떤 날은 로펌에 보낼 질의서를 붙잡느라. 둘은 늘 그런 종류의 일 끝에 함께 남았다.


어느 날 밤, 둘은 나란히 앉아 운전자 상태정보와 차량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고 위험을 예측하는 신사업 검토 자료를 보고 있었다.

개인정보 구조도, 서비스 설명, 로펌 검토의견, 일정표가 한 화면 안에서 번갈아 떴다.

주원은 서비스 설명 화면보다 옆에 붙은 개인정보 흐름도를 먼저 키웠다.

해인이 그걸 보고 아주 짧게 웃었다.


“선배는 늘 서비스 설명보다 개인정보 흐름도부터 보네요.”


“문제는 보통 거기서 먼저 나니까.”


주원은 개인정보 흐름도를 한 번 더 훑고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아래엔 로펌 검토의견을 반영해 둔 설명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해인이 그 설명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 문장 너무 길어요.”


“중요해서 그래.”


“중요한 문장은 짧아야죠.”


“왜.”


“길면 책임이 분산되거든요.”


주원은 웃었다.


“해인 씨는 진짜 문장을 사람 다루듯 하네.”


“사람도 문장 같잖아요.”


“어디가.”


해인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지우면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너무 빨리 확정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끝까지 읽어야 아는 부분이 있잖아요.”


주원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문장 얘기인지 사람 얘기인지 늘 모호하게 남는 말들이 있었다. 그런 말은 곧장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오지는 않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문득 생각했다.

직장동료라는 말은 이상하게 사람을 줄여 말한다.

같은 계절과 같은 밤을 오래 지나온 사람들을.


해인이 퇴근하고 나면 자리가 조금 비어 보였고, 해인이 있으면 같은 문장도 덜 거칠게 느껴졌다.



4장. 바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세희였다.


월요일 오후였다.

오전엔 사내 교육이 하나 있었고, 점심 지나서는 서비스 출시 검토 미팅이 길어졌고, 오후엔 로펌에서 온 장문의 법률의견서까지 도착해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짜증을 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에, 세희가 노트북을 덮다 말고 말했다.


“우리 금요일에 바다 갈래?”


기현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죠. 오늘 정하면 금요일이잖아요.”


해인이 웃었다.

“세희 변호사님 입에서 바다가 나오니까 되게 건전해 보여요.”


“나 원래 건전한 사람이야.”


“그건 최 팀장님만 믿으실걸요.”


기현은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난 원래 세희 믿어.”


세희가 잠깐 웃었다.

“말은 또 저렇게 해.”


그 말은 농담처럼 흘렀다.

그런데 목요일 밤, 해인이 팀 채팅방에 숙소 후보 세 곳을 올렸다.


여기 중에 하나만 정하면 돼요.

금요일은 다들 조금 일찍 나올 수 있잖아요.


기현이 제일 먼저 답을 달았다.


운전 가능.


세희가 뒤이어 썼다.


왕새우튀김은 내가 책임질게.


주원은 한참 뒤에야 입력창을 열고 짧게 답했다.


갑니다.


금요일 오후, 넷은 정말로 조금 일찍 회사에서 나왔다.

알타는 금요일만 되면 네 시쯤부터 상태 메시지가 하나둘 회색으로 바뀌었고, 누군가는 슬쩍 노트북을 덮고, 누군가는 “이건 월요일에 보시죠”를 조금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날은 회사가 잠깐 덜 회사 같아졌다.


기현의 차 트렁크에 짐을 넣고, 해인이 뒷좌석에 올라 블루투스를 연결했다. 세희는 조수석에서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고, 주원은 마지막에 문을 닫고 올라탔다. 해 질 무렵의 도시는 아직 평일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차 안 분위기는 이미 조금 들떠 있었다.



을왕리에 도착했을 때는 바다를 스치고 온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먼저 얼굴에 닿았다.

체크인을 끝내고 바다를 한번 보고, 곧장 조개구이집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펼쳐놓고도 별로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조개구이 하나.”


기현이 말했다.


“조개찜도 하나.”


세희가 덧붙였다.


사장님이 웃었다. “둘 다요?”


기현이 메뉴판을 덮었다.


“오늘은 후회 없이 먹겠습니다.”


그들은 먹을 때 유난히 솔직했다.

기현은 첫 조개를 집어먹자마자 “와” 소리를 냈고, 세희는 뜨거운 김 때문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고, 해인은 처음엔 조용하다가 어느 순간 제일 많이 웃었다. 주원은 그런 걸 보는 게 좋았다.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식사 후엔 세희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왕새우튀김 집에 갔다.

줄이 조금 있었고, 가게 앞엔 기름 냄새가 바람에 섞여 흘렀다.


“왕새우튀김 열 개짜리 하나요. 떡볶이도.”


세희가 주문했다.

그러고는 메뉴판 옆을 한 번 더 들여다보더니 바로 덧붙였다.


“김말이 네 개 서비스로 안 될까요?”


사장님이 바로 웃었다.

“그건 서비스가 아니라 추가인데요?”


“아니에요. 저희 네 명인데 한 사람당 하나씩은 있어야 하잖아요.”


“김말이가 왜 꼭 하나씩 있어야 해요?”


세희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주원이 옆에서 웃었다.

“그게 무슨 논리예요.”


세희가 아주 당연한 얼굴로 말했다.


“설명할 수 없는 논리가 제일 정확할 때가 있잖아요.”


“안 돼요.” 사장님이 말했지만 이미 웃고 있었다.


기현이 거들었다.

“사장님, 저희 멀리서 왔습니다.”


해인도 옆에서 웃었다.

“오늘은 좀 봐주세요.”


“그래도 네 개는 좀….”


세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세 개요. 아니, 두 개. 아니면… 사장님 마음.”


사장님은 결국 한숨을 쉬는 척하면서 김말이를 네 개 넣어줬다.

네 사람은 마치 큰 협상을 이긴 사람들처럼 기뻐했다.


왕새우튀김, 떡볶이, 캔맥주를 들고 해변 쪽으로 내려갔다.

모래사장 한쪽에 작은 버스킹 자리가 있었다. 기타와 키보드, 낮은 조명. 별것 아닌 무대인데 바람 때문에 소리가 멀리까지 갔다. 넷은 왕새우튀김 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았다. 떡볶이 국물 냄새, 바다 냄새, 캔맥주 금속 냄새가 섞였다.


버스커가 몇 곡 부르다가 문득 익숙한 전주를 꺼냈다.

세희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어, 이 노래 좋다.”


기현이 몇 마디 듣더니 말했다.

“조용필 아니야?”


버스커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주원이 맥주 캔을 든 채 물었다.


“이 노래 제목 뭐였지.”


세희가 바로 말했다.

“바람의 노래.”


“맞다.”


기현이 작게 후렴을 따라 불렀고, 세희도 웃으며 붙었다. 해인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아주 조금 움직였다.


주원은 노래보다 그 옆얼굴을 더 오래 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해인의 머리카락 끝이 귀 옆에서 조금씩 풀렸고, 그녀는 그걸 몇 번이고 손끝으로 넘겼다. 그는 맥주가 미지근해지는 줄도 모르고 캔만 오래 쥐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엔 바닥에 앉아 남은 맥주를 마셨고, 기현이 기다렸다는 듯 닌텐도 골프를 꺼냈다.


“여기 와서 이걸 해요?”


주원이 물었다.


“여행은 장비라니까.”


“이 밤의 본질은 이거죠.” 세희가 말했다. “회사 밖에서도 쓸데없는 승부욕.”


실제로 그 밤은 쓸데없어서 좋았다.

닌텐도 골프를 하며 점수를 두고 떠들고, 누가 공을 물에 빠뜨리면 진짜 회의 때처럼 야유를 했다. 세희는 의외로 승부욕이 셌고, 해인은 처음엔 시큰둥하다가 가장 빨리 감을 잡았다. 회사 안에선 늘 무슨 말 뒤에 이유가 붙었는데, 그 밤엔 이유가 없었다. 그냥 웃었다.


밤이 더 깊어지자 술은 줄고 말이 느려졌다.

세희가 먼저 방에 들어갔고, 기현도 “나 진짜 안 된다” 하고 사라졌다. 거실엔 주원과 해인만 남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놨는지 바람이 들어왔다.

멀리 파도 소리가 작게 났다.

탁자 위에는 빈 캔 몇 개와 과자 봉지, 닌텐도 충전선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해인이 캔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했다.


“이런 건 좀 낯설어요.”


“뭐가.”


“회사 사람들이랑 이렇게 오래 있는 거.”


“싫어요?”


해인이 고개를 저었다.


“좋아서 낯선 거죠.”


주원은 대답 대신 바깥을 봤다.

밤바다는 낮보다 사람 속마음 같았다.


“주원 선배는 왜 그렇게 조심해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요?”


“네. 늘 말 직전에 멈추잖아요.”


주원은 웃었다.

“안 멈추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왜요?”


“모르겠네. 회사라서 그런가.”


해인은 잠깐 그를 보다가 말했다.


“회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 뒤에 둘은 한참 조용했다.

어색해서가 아니라, 어색한 걸 굳이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침묵.


그 밤, 주원은 바람과 노래와 해인이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잠깐 생기던 얇은 선을 오래 기억하게 됐다.


돌아오는 길, 해인은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머리가 창문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어 있었다. 주원은 일부러 정면만 봤다. 너무 오래 보면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을 것 같아서.



5장. 나중에

처음엔 늘 같은 불평이었다.


개발팀이 새 서비스를 들고 올 때마다 법무는 늘 제일 마지막에 불렸다. 기획도 끝났고, 화면도 거의 나왔고, 출시 일정도 정해진 다음이었다. 그제야 누군가 “이용약관은 이 정도면 되죠?”, “개인정보 쪽은 문제 없겠죠?”, "법적인 리스크는 없겠죠?" 하고 물었다. 그럴 때면 법무는 이미 방향이 다 잡힌 일의 끝에서, 어디서부터 위험이 스며들기 시작했는지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야 했다.


“이걸 왜 지금 주세요.”


주원이 물으면,


“지금이라도 드렸잖아요.”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도 비슷했다.

개발팀, 제품팀, 마케팅팀과 두 시간 넘게 붙어 있다가 밤 열 시가 넘어서야 회의가 끝났다. 기현은 다른 안건 때문에 먼저 올라갔고, 세희는 로펌의 검토의견을 정리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남은 건 주원과 해인뿐이었다.


둘은 회사 로비로 내려왔다.

밤이 되면 로비는 낮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비가 내리고, 무인 커피 부스가 한쪽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해인은 아이스 커피를, 주원은 따뜻한 커피를 골랐다.


“이럴 거면 서비스 하나 만들면 되는데.”


해인이 종이컵 뚜껑을 눌러 닫으며 말했다.


“무슨 서비스.”


“기술팀이랑 법무 사이 통역해주는 거요. 개발 설명 넣으면 법적 위험으로 바꿔주고, 법무 검토 넣으면 개발 태스크로 다시 풀어주는 거.”


주원이 웃었다.

“창업하시려고요?”


“왜요. 안 될 것 같아요?”


“될 것 같긴 한데.”


“그럼 같이 하실래요?”


질문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그는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해인은 장난칠 때 웃는 눈이 아니었다.


“같이요?”


“네.”


“회사 말고?”


“회사 말고.”


주원은 무인 커피 부스 안에서 로봇팔이 종이컵을 옮기는 걸 봤다.

정확하고 빠르고, 망설임이 없었다.


“전 대표 체질은 아닌데요.”


“그럼 대표는 제가 하고요.”


“난 뭐 해요.”


“일하시면 되죠. 원래 한 변호사님이 일 더 잘하시잖아요.”


주원은 웃었다.

“그 말, 칭찬이에요?”


“그냥 사실이죠.”


그 일은 생각보다 진지해졌다.

둘은 밤에 남아 스타트업 기획서를 만들었다. 법무와 개발 사이를 연결하는 서비스. 개인정보, 보안, 규제, 계약조건을 한 화면 안에서 서로 통역하는 툴. 주원은 법무 검토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질문을 적었고, 해인은 그걸 구조와 화면으로 바꿨다. 둘이 나란히 앉아 기획서를 다듬는 밤은 이상하게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해 오던 사람들처럼.


같은 미래를 나란히 그리는 일은 대화보다 더 멀리 갔다.


사내스타트업 공모 결과는 웃어넘기기엔 조금 씁쓸했다.

선정된 건 해인뿐이었다. 회사에 먼저 중요했던 건 그 아이디어를 지금 당장 시제품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점이었다. 해인은 직접 설계하고 코드를 붙여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주원에게 기대된 몫은 그다음에 법적 구조와 리스크를 받쳐주는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해인이 먼저 물었다.


"괜찮아요."


"거짓말."


"그럼 반쯤."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저도 별로 안 기뻐요.”


“왜요. 해인 씨는 된 거잖아요.”


“같이 하는 게 아니면 의미가 좀 줄잖아요.”


그 말이 위로인지 진심인지, 주원은 끝내 따져 묻지 못했다.


그리고 세상은 둘이 결정을 미루는 사이 너무 빨리 바뀌기 시작했다.


개발팀이 새로 가져온 AI 코딩 보조 도구는 짧은 프롬프트 몇 줄만 넣어도 그럴듯한 제품을 금세 만들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며칠은 걸릴 것 같던 일이 한 시간 안에 모양을 갖췄다. 아직은 사람이 더 많이 들여다봐야 했고, 아직은 실수도 많았다. 그래도 해인과 주원은 알았다. 이건 단지 일이 빨라진 정도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어느 밤, 해인이 노트북 화면을 주원 쪽으로 돌렸다.


“보세요.”


몇 줄 프롬프트 아래로 함수 구조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주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 조금 늦은 것 같죠.”


해인이 말했다.


그 말이 창업 얘기만 하는 것 같지 않아서, 주원은 더 대답을 못 했다. 같이 시작할 수 있었던 시간도,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감정도, 둘 다 조금씩 늦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비가 왔다.

둘은 회사 정문 처마 아래에 잠깐 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빗물이 비스듬히 흩어졌다.


해인이 어둠 쪽을 보다가 말했다.


“대학생 때 미국에 잠깐 있었어요.”


“미국이요?”


“네. 인턴하러.”


“처음 듣는데.”


“말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런 바람이 불면 가끔 생각나요."


주원이 고개를 돌렸다.


“미국 어디에 있었어요?”


해인이 비를 한 번 보고 대답했다.


“뉴욕이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회사에서 몇 블록만 걸어 내려가면 배터리파크가 있었어요. 물가를 따라 난 공원이었는데, 개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늘 지나가고, 푸드 카트에서 핫도그를 파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치즈핫도그를 정말 맛있게 만들어주셨거든요. 조금 더 걸어가면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작게 보였고요.”


주원은 그 장면을 본 적 없는데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바람, 핫도그 냄새, 개들이 지나가는 작은 공원, 멀리 작게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


“배터리파크는 자주 갔어요?”


“머리 복잡할 때요.”


“효과 있었어요?”


해인이 웃었다.


“적어도 걷는 동안엔요. 바람이 세서, 뭘 붙잡고 있던 손이 좀 느슨해져요.”


그 말은 오래 남았다.

바람이 세서, 뭘 붙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진다는 말.


그날 밤 둘은 한참 택시를 기다렸다.

비는 멎지 않았고, 배차 시간은 자꾸 뒤로 밀렸다.


“한 변호사님.”


“네.”


“나중에.”


해인이 말했다.


그다음 말은 하진 않았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 문장도 있었다.


주원은 그 순간 몇 마디 대답을 떠올렸다.

같이 해보자고,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고.


그런데 그는 늘 그랬듯, 가장 안전한 말부터 골랐다.


“나중에 보죠.”


해인은 아주 작게 웃었다.

좋은 뜻인지, 포기한 뜻인지, 주원은 끝내 잘 몰랐다.


택시 불빛이 와서 멈췄고, 그녀가 먼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차가 멀어졌다. 비는 그칠 기색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둘은 스타트업 기획서를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

없앤 것도 아니고, 완전히 접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미뤘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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