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글입니다. 부족하거나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세요."
2020년, 저는 한국은행에서 진행한 CBDC 1차 파일럿 리서치에 참여하며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과 현실의 간극을 처음으로 깊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CBDC의 주요 목적 중에는 1) 실물 화폐의 디지털 전환과 2) 이를 통한 화폐 발행 및 관리 비용 절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CBDC를 구현하려 하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바로 블록체인의 '투명성'이라는 특징이 화폐가 본질적으로 가져야 할 '익명성'과 충돌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지폐로 물건을 살 때는 '누가, 어디서, 얼마를 썼는지'가 당사자 외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거래 기록이 원장에 남는 블록체인을 적용하는 순간, 모든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다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후 토큰증권(STO) 플랫폼을 만들 때에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어려움은 '블록체인은 적용하고 싶지만, 현재 시스템의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모순적인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토큰증권을 발행하는 곳과 유통하는 곳을 분리해야 하는 규제, 블록체인에 기록된 데이터를 선택적으로 공개하고 싶다는 요구 등 여러 과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흔히 Web2라고 부르는 현재의 중앙화된 시스템에 블록체인을 접목할 때 항상 마주치는, 어쩌면 당연한 성장통일지도 모릅니다. 개발하는 당사자조차 무엇이 정답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많은 경우, 고객사에서 '블록체인 = 분산화된 데이터베이스' 정도로 인식하는 데서 오해가 시작되곤 합니다.
(여담이지만, 초창기 블록체인 강의에서 '블록체인은 절대 데이터가 변조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블록체인에 들어간 데이터는 절대 변경할 수 없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많은 분들의 지식 수준이 높아졌지만, 정확히 말하면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변경 이력'이 모두 남기 때문에 '특정 과거 시점의 데이터를 현재 시점에서 임의로 조작할 수 없는 것' 이 핵심입니다.)
제가 몸담았던 회사는 국내 증권사 중 가장 먼저 토큰증권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개념증명(PoC) 수준이었지만, 실제 증권사 애플리케이션과 연동했고 상품만 없었을 뿐 어느 정도 운영도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판단 아래, 이 플랫폼은 C레벨 보고 이후 곧바로 창고로 향했습니다. 솔직히 개발한 입장에서도 회사의 결정이 충분히 이해는 갔습니다. 당시 저희뿐만 아니라 수많은 회사가 미술품, 부동산, 음원 등 시장에서 이미 검토되던 아이템들을 토큰증권에 녹여내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RWA(실물자산 토큰화)의 시초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컸습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해외 비상장 주식을 블록체인에 담아 토큰증권화하고, 이를 전 세계 투자자들이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블록체인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면, 국내의 다양한 데이터들을 공유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국경을 넘어 전 세계와 데이터를 공유하고 자산을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는 증권이라는 도메인의 복잡한 법적 규제를 잘 몰랐던 개발자의 순진한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토큰화한 주식을 국내에서 거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기사를 보며, 제 생각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작은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제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솔직히 저는 왜 많은 사람이 스테이블코인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위 암호화폐의 극심한 가격 변동성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 가치를 법정화폐와 같은 실물자산에 고정(pegging)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보유한 코인의 가치에 상응하는 실물자산을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하며, 대부분 이 준비금은 해당 법정화폐 국가의 국채 등으로 채워집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가장 반기는 곳은 어디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일 수 있습니다. 정부가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한 채권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대량으로 매입해주기 때문입니다. 최근 유럽의 가상자산 규제 법안인 MiCA에서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 준비금을 의무화한 것을 보면, 이러한 관계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참고로 세계 최대 달러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는 이 규제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우리 같은 일반 사용자에게는 어떤 장점을 가져다줄까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어야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발전할 수 있다'는 글이 많지만, 저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행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국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네이버페이나 카카오페이 포인트를 코인으로 바꿔 블록체인에 기록한 뒤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그 차이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사용자가 스테이블코인의 효용을 체감하려면, 이를 사용함으로써 금전적 이득을 얻거나 기존보다 확실한 편리함을 느껴야 합니다. 먼저 '편리함'은 더 나아지기보다 오히려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간편 인증 시스템 외에 블록체인 지갑을 위한 별도의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발행사가 기존 사용자 계정과 지갑을 연동해준다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동일한 수준의 편리함'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금전적 이득'은 어떨까요? 다양한 정부 및 기업의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유독 프라이빗, 즉 폐쇄형 블록체인을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얻는 상생의 가치보다는, 내가 힘들게 모은 고객 데이터를 남에게 공개하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특히 과거 금융권 해킹 사건 이후 대부분의 금융사가 폐쇄망 환경에서만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해야 하는 규제 때문에, 퍼블릭 블록체인을 활용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결국 국내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나온다면, 각 기업이 독자적으로 만들거나 몇 년 전 토큰증권처럼 여러 기업이 모인 컨소시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쪽이든 프라이빗 블록체인일 확률이 크고, 이는 결국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데이터를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할 것인가, 아니면 블록체인에 저장할 것인가'라는, 그다지 혁신적이지 않은 질문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려면, 결국 국경을 넘나드는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되고 유통되어야 합니다. 해외 사용자들이 우리가 USDT, USDC를 통해 달러에 투자하듯,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자유롭게 거래하고 보유하는 시대가 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런 그림이 아니라면, 앞서 말한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국내 채권을 사주고, 정부는 운용 자금이 늘어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가령, 가장 대중적인 ERC-20 표준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올린다고 가정해봅시다. 퍼블릭 블록체인에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수수료(가스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마주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빠르고 저렴한 '혜자' 서비스였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간혹 사용자 친화적인 UI/UX를 블록체인의 장점처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블록체인 기술과 전혀 무관합니다. '토스'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최고의 사용자 경험은 현재의 금융 시스템 위에서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기에, 더 깊이 파고들면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올 혁신적인 장점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지금도 달러 투자의 한 방법으로 USDT를 구매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USDT나 USDC를 실물 카드와 연동해 실제 화폐처럼 쓴다고도 하지만, 적어도 제 일상적인 환경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올 뚜렷한 장점이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쓰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낮은 수수료와 편리함을 제공하지 않는 한, 그저 또 하나의 결제수단에 그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