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감상기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잘 만든 상업영화라는 것이었다. 동 제목의 원작 소설이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또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는 것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잘 만든 것이었고 또한 원작을 충실히, 때로는 극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었다.
영화는 현실을 중심으로, 김지영의 생애사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일단 주가 되는 것은 지금 여기, '현실'의 상황이다.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경력이 단절된 기혼의 30대 여성의 서사가 가장 중심에 있고 많은 인간의 서사가 그러하듯, 이로부터 연결되는 다양한 관계의 서사들이 동시에 펼쳐진다. 각자는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세계에 살면서 아주 가끔 서로를 이해하고, 아니면 이해하는 척 하곤 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드러났고 이는 '김지영'이라는 개인이 관계하는 꽤 넓은 범위의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곤 하였다.
사실 등장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대체적으로 쾌적하고, 외형상으로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마저도 나빴다면 이 영화의 장르는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묘사의 디테일은 치밀하다. 특히 가사노동의 모든 순간들은 지나치게 가혹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용이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드러났고, 무엇보다 그 가사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다양한 권력 관계의 모습들을 탁월하게 묘사하였다고 생각했다. 그 공간들을 비추는 화면 속에서, 아마 대부분은 그러한 생활공간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한 번 이상은 살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실제로 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의 깊이와 범위, 그리고 방식에 따라 이 영화가 묘사한 이슈나 상황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답은 명료하지만은 않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혹은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 삶의 모습들이 항상 예정된 방식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엄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부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문제가 사회적 권력관계, 구체적으로는 젠더 정치학의 산물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그러한 선택의 가능성이 특정 젠더에 더욱 편중되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 다음에서야 우린 그 질문의 범위와 깊이를 어느정도는 확정할 수 있게 될 것만 같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적용 가능한, 가장 유의미한 인식론은 여성주의적 상상력이 될 것이었다. 페미니즘, 그리고 그 페미니즘의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그 모든 범위에서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갈지"에 관한 고민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라는 형식을 빌려 치열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서사에 관하여는 사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는 않다. 다만 적절한 신파가 있었다는 정도를 감상기에는 실어야 할 것 같다. 부족하지도 넘쳐흐르지도 않는 한국적 신파는 영화를 마치 황금시간의 공중파 드라마처럼 익숙하게 만들어주었다. 이것은 사실 나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한국 상업서사의 문법을 닮은 것이었고, 오히려 치밀하게 해석하여 구성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신파와는 다소 멀다고 생각했던 나는, 여러 이유로 인하여 꽤 많이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영화 외적인 감상 중 하나는, 관객에 관한 것이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찾은 학교 인근의 스크린에선 몇 명의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같은 객석에 자리하였었고, 그들은 영화의 끝과 동시에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먼저 그 가사노동의 장면들에 대하여 (주로 공유에 대한 비난 등의) 소회를 나누던 점, 서사의 주인공이 관계하는 가족들의 양상에 대하여 토론을 하던 점 ("그래도 쟈 엄마는 진짜 편 많이 들어주네") 등이 인상깊었다. 사실 그 내용이 내 트위터의 타임라인에서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탓이다. 크레딧이 끝까지 다 올라간 다음에서야, 그들은 나와 함께 출구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고 (아마 나의 편견이겠지만) 무언가 공감을 얻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남자들이 봐야 할 영화다"라는 한 중년 여성의 외침과 함께 그들과 나의 관람은 완전히 끝이 날 수 있었다.
그치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이것은 사실 아주 사적인 이야기인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 나와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것이지만, 엄마와 이 영화를 함께 보았다면. 볼 수 있었다면.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이는 동명의 원작 소설과는 다소 다르게, 서사의 핵심이 결국에는 가족으로 향하였던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가족애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 수준이라면, 어쩌면 가족 성원으로서의 엄마와 나는 서로를 많이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남아서. 그리고 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이 울었고 그리웠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의 삶은 조금 더 많이 나아져야 한다. 김지영이 아닌 김지영들도 더 많이 나아져야 하고, 김지영의 딸 지원이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욱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지금 여기, 우리 세계의 책무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실제로 원작 소설의 작가 조남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늘 신중하고 정직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김지영 씨에게 정당한 보상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지원이보다 다섯 살 많은 딸이 있습니다. 딸은 커서 우주비행사와 과학자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제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되어야 하고, 될 거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딸들이 더 크고, 높고, 많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016년 가을 조남주"
마지막으로 감상기에 남기고 싶은 말은, 이 영화와 함께 이슈화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별'의 문제이다. 혹시라도 이 안온하게 설계된 서사의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음에도, '김지영'에 관하여 이유없이 불편하거나 아니꼬운 마음이 들었다면, 때론 '김지영'과 관계하는 여성들의 행동들이 언짢은 기분으로 이어졌다면, 혹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당연한 것으로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정말 그러길 바라진 않지만 김지영의 서사가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마냥 너무나 신났다면(...) 자신 주변을 반드시 돌아보기를 부탁한다. 그런 자들에게는, 적어도 이 서사를 향유할 '우리'의 자격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