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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종 Feb 27. 2017

<성서, 거룩한 글들의 도서관> 그리고 스타트업

시대의 현상으로 작용하는 플랫폼의 기반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서, 거룩한 글들의 도서관>의 저자 이원우는 성서를 다수의 저자가 서로 다른 사회, 정치, 문화, 경제적 배경 속에서 나름대로 경험한 '신'의 활동을 각자의 독특한 시각과 문체로 표현한 작품들로 구성된 집합체로 규정함으로서, 성서를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영적, 역사 비평적 혹은 이념적, 구조적, 문학적 접근을 넘어선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이 성서를 성서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핵심으로 파악하고, 성서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소외된 상태로 전락한 이 세상을 향해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저자가 성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핵심적 요소로 제시한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은 비단 성서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등 다양한 종교를 통해 유일성에 대한 찬양과 수사적 변주를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된 접근이기도 하다. 성서가  서양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적 도구를 넘어,   현대인들의 내면의 신성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괄해 내는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을 해석하고, 동시대속에 실현, 변주하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들을 담아내는 큰 그릇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시대의 개개인에게,  여전히 열린 텍스트로 작용하고 있는 성서의 플랫폼으로서의 지위는 새로운 서비스를 통해 고객을 개발하고, 진정성을 추구해 나아가는 스타트업에게도 주요한 영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시대와 문화권, 인종을 넘어  시대의 현상으로 작용하는 플랫폼의 기반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는 화두를 던져 보고자 한다.  또한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인 커트 보네거트와 리처드 브로티건에게 영향을 받은 무라키미 하루키가 그려내는 사회적 성공의 욕구가 휘발되어 버린 반영웅주의적인 평범한 남자들이 겪는 환상적인 모험들의 내러티브와 성서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을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여전히 현대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성서라는 플랫폼의 스토리 텔링 전략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의 '하루키문학과 <태엽감는 새>'에 따르면,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생활이라는 삶의 구체적 물질의 기반을 상실한 채, 허공 위를 떠서 흘러간다. 하루키는 텅 빈 방, 텅 빈 거리, 텅 빈 세계의 공허함 위에 세워져 있는 삶의 우수, "이 텅 빈 세계 속에서" 외롭게 혼자 춤추고 있는 사람들의 그 무상의 행위를 그려 나간다고 한다. 실재가 사라져버리고, 그것이 기호와 이미지로 대체되어버린 고도자본주의적 삶의 핵심이다. 하루키라는 작가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기꺼이 향유하면서도, 그 근원에서는 텅 빈 공동을 안고 살아가는, 텅 빈 세계를 다만 스쳐 지나갈 뿐인 현대인들의 삶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인 <태엽갑는 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편의 세계에서 가시적인 세계와 삶을 움직여나가는 어떤 미지의 동력과 그 흐름을 조절해 나아가는 이 세계와는 전혀 또 다른 비현실적인 세계의 이야기, 혹은 실업의 나날을 보내는 한 젊은 남자가 겪는 기묘하고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세계로 나아가는 사다리,  <태엽감는 새>의 우물 Vs.  출애굽의 사막 

<태엽감는 새>의 주요한 상징은 '우물속으로 들어가기'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내가 가출을 하고 제 삶이 온통 불투명하고 모호해 버리자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된다. 주인공은 그 우물에서 죽음에 포박된 '육체'를 발견하고 육체는 그 죽음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처럼 하루키 소설의 우물은 죽음에의 잠재된 욕구와 고통을 주는 세계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자궁의 상징이기도 하여, 태엽감는 새로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존재론적 각성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이기도 하다. 

한편, 성서에 나타난 출애굽의 사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화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종교적 체험에서 발생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태엽감는 새>의 우물과 유사한 상징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막의 길은 식량이 풍부하고 안전한 이집트의 비옥한 땅에는 비길 수 없었다. 그 길은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복잡하고 거대한 세계를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던 '태엽감는 새'는 이집트의 평범한 생활과 빵과 고기와 같다. 춥애굽의 여정은 인간이 가지는 본능적이고 불완전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정화를 필요로 하는 인간임을 고백함과 더불어 새롭게 신앙의 여정을 가는 회개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하게 된 시련은 결국 신을 자기의 욕구를 채워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이 시련을 통해 그들은 그릇된 기복신앙으로서의 종교심을 넘어, 주님인 동시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존중하는 인격적인 신앙으로 이끄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이란, 이와 같이 악을 통해 선을 이끌어 내며, 반역자를 일깨우시고, 진정한 의미의 종교심을 일깨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발현인 것이다. 

<태엽감는 새>의 주인공 역시, 우물 속에서 반점을 얻는 데, 그 반점이 나중에 신비한 치유력, 초자연적 힘의 원천임이 드러난다. 이는 이제까지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과 진리의 주체의 표상인 '아버지'를 상실한 현 시점에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주는 징표이다.  출애굽의 사막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곳으로써 종교적인 의미의 상징이 크듯이, <태엽감는 새>의 우물 역시, 주인공 내면의 초자연적 힘의 원천, 즉 하나님을 발견하고, 시대의 주체자로서 능동적으로 이를 현시해 나아가고자 하는 동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유사점을 찾을 수 있겠다. 


재생의 동반자, <댄스댄스댄스>의 양사나이 Vs. 갈라디아서의 십자가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던 시절이 있었 듯, 현대인들은 상품의 구매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 낸다. 여기서는 낭비가 곧 미덕이다. 물질과 상품만 낭비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사람과 개인 역시 낭비의 대상이 되고, 사회라는 소용돌이 속에 삼켜지고, 용도가 폐기되면 버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나사못이나 태엽 같은 존재에 불과한 개인으로 살아가면 누구나 갖게 되는 불만과 불안을 넘어,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은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나비효과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거부하는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그의 도전은 매우 실존적이다. 유미요시를 아파트까지 바래다주면서, 그녀가 잠시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하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고 호텔로 돌아온다. 그 전 같으면 서슴지 않고 같이 잤겠지만, 이젠 그가 그리는 이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곤, 스스로 거대한 거미집과 고도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이탈함으로서, 스스로의 재생의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갈라디아서 2:20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스스로의 생명에 종말을 고하고, 그리스도가 사는 신전으로서의 재생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에서 해석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나의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자 , 이 감격으로 날마다 주시는 삶을 누리라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혁명적인 대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확실하게 죽어야 할 죄인인 나는 무엇일까? 하루키는 <댄스 댄스 댄스>의 양사나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를 이데올로기, 즉 관념의 상징으로 제시하며, '과거=관념=환상'을 떨치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념의 세계에 대한 증인이자, 어둠의 존재의 파수꾼인 양사나이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로 삶의 터전을 옮기도록 충고하고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갈라디아서 속의 십자가 역시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새롭게 부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서의 핵심적인 두 가지 모티브, 회개와 재생에 대하여, 하루키의 소설의 소재들과 비교하며, '하나님의 관점(theocentiric perspective)'을 구체화해보는 시도를 진행해 보았다. 하루키는 사회의 기득권 바깥에서, 현대사회라는 바다 위를 떠도는 익명자들이가도 하지만 내면의 깊은 곳에는 자기애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의 나르시시즘을 간파해 내었다.  자, 이제 “스타트업의 창업자로서, 새롭게 출시한 서비스로 유입을 위해,  개발해야 할 고객은 누구일까? 나의 브랜딩과 스토리텔링의 대상은 누구일까?  “ 라는 질문의 프레임으로 돌아와 보자. 제품 혹은 서비스를 사용할 만한 목표 인구 집단 안에 있는 다양한 사용자 유형들을 대표하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는  페르소나 분석을 넘어, 인문학적 성찰을 더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개발해야 할 고객은 연령대와 소비성향, 거주 지역으로 분류되는 정량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현대사회라는 바다 위를 떠도는 익명자들이가도 하며,  내면의 깊은 곳에는 자기애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나르시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여전히 성서는 이와 같은 자기애와 신성성을 동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와 욕구를 포괄해 내는 플랫폼으로서, 현대 사회 속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확산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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