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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징기스칸을 먹으러 가다 (2)

여행을 통해 '아는 곳'이 생긴다는 것

by 하루
삿포로와 징기스칸(ジンギスカン)


벌써 세 번째 삿포로 방문이다. 이번 여름 삿포로행 티켓을 끊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청의 호수'였지만, 징기스칸 다루마를 대신할 곳으로 찾아낸 이 식당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니 추운 겨울, 두꺼운 외투를 모두 가게 밖에 걸어두고 들어가 몸도 마음도 훈훈하게 녹일 수 있었던 그곳을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식사 장소로 떠올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이번에도 게스트하우스 스탭에게 부탁해 전화로 예약을 하고 6개월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징기스칸'이라는 용어는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듯이 몽골의 칭기스 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양고기를 떠올렸을 때 자연스레 몽골이 떠오르고, 몽골을 떠올리면 칭기스 칸이 따라오는 직관적인 흐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 원래 일본에서는 양을 기르지 않았는데,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군모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양을 들여왔다고 한다. 이 때부터 북해도에서 양고기 요리의 역사도 시작되었고 현재는 북해도를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다. 삿포로에서는 '징기스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몽골의 지도자보다 화로 위 양고기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당연해졌다.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그 곳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서니 6개월 전과 똑같이 우리를 맞이해 주신다. 예약한 자리의 불판은 이미 달구어져 있고, 개인별 접시와 손수건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다. 당연하듯 나마비루와 징기스칸을 하나씩 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은은하지만 강한 불을 품고 있는 숯불 화로 위에 징기스칸 특유의 투구 모양을 한 불판이 올라가있다. 처음에는 불판에 적당한 기름기를 더하기 위한 비계 덩어리 '아부라미'를 올리고, 그 위로 이 정도면 불판 밖으로 넘치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의 야채를 쏟아넣는다. 슥-슥-슥-, 불판의 가장자리로 야채를 밀어내고 중앙 부분에 시뻘건 양고기를 올리면 그 때부터 징기스칸 마라톤의 시작이다.


징기스칸의 시작을 알리는 화로 위 '아부라미(비계)'
갑자기 와장창 올려주시는 '야사이(야채)'
야채를 가장자리로 슥슥 치우고 징기스칸을 올리면 드디어 불판 위 마라톤이 시작된다.


징기스칸의 핵심은 화로다. 유난히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는 북해도에서 뜨끈뜨끈한 화로를 중앙에 두고 끝없이 고기와 술,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징기스칸이 사랑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최저기온과 최고기온이 모두 영하를 찍는 삿포로의 겨울에는 든든한 패딩과 겨울용 부츠, 장갑을 껴입어도 한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추운 날씨를 뚫고 징기스칸 식당에 들어섰을 때 얼굴로 전해오는 열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올해 1월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가게 앞의 옷걸이에 오리털 패딩을 걸어두고 반팔 차림으로 징기스칸을 즐겼다. 찬 공기에 볼이 얼얼해지는 날씨를 뚫고 10m 정도 비밀의 통로를 걸어들어가면 화로의 열기와 즐거운 이야기, 오가는 술기운에 온몸이 훈훈해지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그러다보니 이번 여름 삿포로 여행을 앞두고 징기스칸을 먹으러 갈 생각을 하면서, 마음 한켠에선 걱정도 되었다. 이렇게더운데, 괜찮을까? 더운 날씨에 괜히 추억에 잠겨 징기스칸을 먹겠다고 고집부렸다가 더위를 먹고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닐까.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우리를 대신하여 예약 전화를 했을 때도, 가게 안에 많이 더운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하셨다. 미리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오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걱정은 기우였다. 열심히 돌아가는 선풍기와 활짝 열린 창문, 시원한 나마비루가 열일을 해주어 뜨거운 화로를 앞에 두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짝꿍은 오히려 지난 겨울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가 더 더웠다고 기억했다. 하긴, 그 때는 온몸에 오른 열기를 식히기 위해 한 명씩 반팔 차림으로 영하의 가게 밖 거리에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으니. 영하 4도의 삿포로 길거리에서 반팔을 입고 열을 식히는은 징기스칸을 먹을 때만 가능한 일 아닐까.



주인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이곳의 양고기는 뉴질랜드산이란다. 양고기의 냄새도 거의 나지 않고, 한국산 고추가루와 다진마늘을 취향껏 넣어서 만든 개인 맞춤 소스에 고기와 야채를 듬뿍 찍어먹으면 더이상 말이 필요없다. 징기스칸을 주문하면 가게 중앙의 아일랜드 식탁에서 양고기를 직접 손질해서 담아주시는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올해 1월 이곳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여드리자 옆자리 일본분들과 대화했던 것을 기억하시며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다. 먼저 오지랖을 부리지 않지만 언제나 친절하고 호감어린 응대를 해주시는 것이 일본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ㄷ자 형태의 테이블에서는 주인 아주머니가 모든 손님들을 시야에 담고 테이블을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손님들도 이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손님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국어 안내가 전혀 없고, 주인 아주머니께서 외국어를 사용하지도 않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가게 안에 한국인 네 명이 다양한 메뉴를 시켜가며 징기스칸을 즐기는 모습이 천연덕스러워보였는지, 오늘도 왼쪽에 앉은 아저씨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말을 건네신다. 사실 우리가 스지(양의 근육을 토마토와 레드 와인에 오랜 시간 삶은 스튜같은 요리)나 이모 쇼츄(고구마를 베이스로 만든 소주) 같이 외국인들이 시킬 일이 없을 것 같은 메뉴를 주문할 때부터 이쪽을 향해 힐끗힐끗 눈길을 보내셨다.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하자 B를 향해 일본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 하는지 칭찬하신다.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말, 혹시 훗카이도 대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 아니라고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이 집의 메뉴에 대한 칭찬을 이어갔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주인 아주머니께서도 이야기에 동참하셨다. 안그래도 요즘 종종 한국인 손님들이 오신다고. SNS를 하지 않아서 어디에도 홍보를 한 적이 없고, 한국어 서비스도 안 되는데 어떻게 다들 알고 찾아오는지 신기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사실 지난 겨울 구글맵에서 이곳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 가게를 평가한 댓글은 손에 꼽혔다. 그것도 전부 일본인 또는 다른 나라 여행자가 작성한 댓글 뿐이라, 신경을 써서 사진과 함께 정성스레 한국어 댓글을 추가했었다. 올 여름 삿포로에 오기 전에 구글맵에서 다시 이곳을 검색했을 때 최근 댓글 12개가 모두 한국 사람이 작성한 것이었다. 아주머니께 구글맵을 통해 찾아올 수 있음을 알려드리고 한국 사람들이 더 올 수 있을 것이라 말씀드렸다.


'아는 곳'이 생긴다는 것


여행을 통해서 '아는 곳'을 만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어떤 이에게 여행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아나가는 것이라면, 나에게 있어 여행은 그곳을 다시 가야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추억이 1회용이 아니라 몇 개월, 때로는 몇 년의 휴지기를 갖더라도 현재진행형인 것. 그 맛에 여행을 끊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곳'에서 즐겁게 추억을 곱씹고 또 다음을 기약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24시간 전에 우리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일이 있었다니 벌써 며칠은 삿포로를 여행한 기분이다. 따뜻한 온천에 몸을 녹이고 징기스칸을 먹으며 따뜻하게 속도 녹였으니 7박 8일의 긴 여행을 시작하는 첫 날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좋다. 내일은 또 어떤 곳을 알게 될까?







오늘의 깨달음


- 개인적으로 '아는 곳'을 늘여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고 믿지만, 이곳을 처음 방문한 또다른 여행 메이트 K에게도 이 곳의 징기스칸은 감동이었다고 한다. 특히 본인이 생각하던 '일본스러운' 이미지를 완벽히 만족시키면서도 요리도 맛있어서 흠뻑 빠져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짝꿍이 옆에서 말하고 있다. '잘 만든 음식은 어디서나 먹히는 거 아닐까?' 혹시 이곳을 찾아가실 분들은 하루 전날 미리 예약을 꼬옥 하고 가시길. 12석 정도 밖에 자리가 없고 거의 예약으로 자리가 잡혀있다. 숙소 스태프에게 전화를 부탁하거나 방문 예약 필수.


오늘의 후회


- 어딜가나 B의 일본어 실력은 현지인들을 사로 잡는다. 현지인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B의 일본어 실력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 그런데 놀랍게도 B는 학습지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작년에서야 처음 일본에 와봤다. 한 때 학교에서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하고 지역대회 말하기 대회까지 나가고도 까맣게 잊어버린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반성도 된다. 언어는 변명이 필요없다. 그 때 그 때 관심을 가지고 뭐든지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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