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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징기스칸을 먹으러 가다 (1)

우리가 그 곳을 또 가는 이유

by 하루


삿포로의 여름밤은 서늘하다


공항버스를 타고 80분 정도 달린 끝에 스스키노 거리에 내렸다. 온 몸을 휘감는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삿포로의 여름 첫 인상은 서늘함이었다. 한국보다 시원하다고 해도 여름은 여름이겠거니 하고 반팔과 반바지로 무장했으나 그것은 삿포로의 바람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스스키노 거리에서 내려 숙소까지 10여분을 걷는 사이, 서늘하다 못해 찬 바람이 쉴 틈 없이 불었다. 36도, 37도를 기록하는 곳에 있다가 최저 기온이 20도 이하인 곳에 도착하니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이거 잘못하다간 도착하자마자 감기에 걸리겠는데? 부랴부랴 비상용으로 챙겨왔던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삿포로의 여름은 이 정도란 말이야?


여행 첫 날부터 지치지 않으려고 공항에서 충분히 쉬었다 오는 일정으로 움직였지만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금세 피곤해져 있었다. 공항 옆 비행장에서 에어쇼가 끝나는 시간과 우리가 공항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겹쳐 평소보다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까지 오는 길에도 찬 바람과 싸우며 10분 이상을 걸었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수면시간이 부족했다. 여행 첫 날, 삿포로에 도착해 첫 번째 식사는 어떻게 먹을까?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짝꿍과 B, 나는 마지막으로 삿포로를 왔을 때 먹었던 징기스칸 집을 예약했다.


그 곳을 또 가는 이유


하나의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기간이면 충분할까. 아니, 하나의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한정된 기간으로 충분해 질 수나 있을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문장에 마음이 기울어지리라.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떠난 첫 번째 여행에서 이미 '여행'이라는 것에 푹 빠졌다. 그 때 가장 크게 느낀 여행의 매력은 매일 반복되고 느린 인생의 맛을 새롭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일상이 단맛 빠진 풍선껌 같다면 여행은 칼라만시 원액 같달까.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매력에 빠져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을 찾아 기회가 닿는대로 떠나려 했다. 그러다 교토를 만나고선 여행의 또다른 매력을 깨달았다. 같은 장소여도 매일이 새롭게 보이는 마법같은 힘이 그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말처럼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나만의 의미나 경험이 더해졌다. 그 때부터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라면 두 번, 세 번 찾아갔다. OO에 가는 티켓을 끊었다고 하면 '거기는 예전에 가보지 않았어?', '또 가?'라는 반응부터 '거기에 꿀 발라놨니?'라는 말을 듣는 일이 잦아졌다. 유별나 보여도 이미 다녀온 곳을 또 찾아가는 이유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냥 그곳이 좋아서.


비밀의 통로 끝에서 만나는 심야식당


지난 겨울 삿포로에서 징기스칸을 먹고 싶었던 우리는 수많은 검색 끝에 징기스칸 다루마를 대신할 장소를 찾기로 했다. 첫 번째 삿포로 여행에서 징기스칸 다루마 4.4점을 방문했었고 나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우리가 징기스칸 다루마를 처음 방문했던 2017년 1월 이후 1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나보다. 그 사이 삿포로 여행을 다녀온 후기 중에서 징기스칸 다루마를 찾아갔다가 실망했다는 내용의 글이 많이 보였다. 여행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지나치게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하자'인데, 후기들을 찾아보니 여전히 사람은 많고, 외국인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했다는 평도 보였다. 그래서 구글맵과 트립어드바이저, 타베로그 등의 다양한 추천, 평가글을 검색하고 또 검색한 끝에 괜찮아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결정적으로 이 곳의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의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여긴 심야식당이다! 무조건 가자.


일본드라마 <심야식당>의 세트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았을 때 한국 사람은 아직 많이 찾지 않았고, 무조건 예약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식당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았을 때 영어 메뉴는 커녕 사진 메뉴도 없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겐 일본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는 B가 있었다. 당시 우리는 스스키노 거리의 카락사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호텔 데스크에 부탁해서 전화로 예약을 했다. 모든 것이 착착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당시 삿포로 여행에서 처음으로 현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찾는 식당에 도전한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도 됐다.


구글맵에서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찾아갔지만 식당 입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여기가 맞는데, 하면서 몇 번을 배회하다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문을 발견했다. 입구 인테리어와 간판의 꾸밈새까지, 언듯 봐서는 징기스칸 식당이라기보다 서양식 카페 같아 더욱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나무로 만든 문을 조심스레 여니 기다란 통로가 나온다. 간판을 봤을 때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데, 정말 여기가 맞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일단은 그 통로를 따라 들어가본다. 안으로, 안으로. 좁고 긴 통로를 들어가면 오른쪽 창문으로 그곳이 보인다.


통로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가게 안. 마치 드라마 속 배우들 같지만 그저 징기스칸을 먹으러 오신 손님들이다.


가게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통로. 통로의 끝에 외투를 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역시나 예상대로 메뉴판은 귀엽고 정갈했다. 징기스칸을 메인으로 양고기 스튜라고 할 수 있는 스지와 여러 가지 사이드 디쉬가 단촐하게 요리부를 구성하고 있다. 반면에 술은 맥주는 기본, 다양한 종류의 소주와 사케(일본주)에 와인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ㄷ자 모양의 테이블의 중심에서 마스타가 끊임없이 메뉴를 준비하고, 화로의 열기와 사람들의 열기, 고기 냄새가 함께 익어가는 곳이었다. 분위기에 취해서 신이 난 우리는 최대한 다양한 메뉴를 먹어보자며 징기스칸 여러 접시와 스지, 맥주와 소주, 사케로 주문을 이어갔다.


분명 외국에서 온 사람들인데 태연하게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옆 자리에서 먹고 계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건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B를 향해 일본어를 잘 한다는 칭찬이 이어졌다. 알고 보니 한 분은 한국을 20번 이상 다녀온 여행 베테랑이셨고, 영어도 유창하게 하셔서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낯선 이방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은 이미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다름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유쾌한 시간을 완성시킨다.


한국 문화는 어떤지, 일본 문화는 어떤지, 다른 나라는 어디를 다녀봤는지부터 시작해서 왜 여행을 다니는지,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까지. 때로는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가장 쉬운 법이다. 잘 아는 사람들끼리라면 머쓱해서 굳이 꺼내지 않을 이야기도, 조금은 유치한 이야기도 바디랭귀지와 2개 국어를 섞어서 이야기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결국엔 서로 SNS 연락처를 교환하고 마스타에게 부탁해 기념사진까지 찍었었다. 서로를 처음 보는 손님들끼리 이렇게 알아가는 사이에도 마스타는 묵묵히 음식만을 준비하셨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 하지만 또 필요한 것은 다 내어주는 존재감이 인상 깊었다. 비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입구, 드라마 <심야식당>을 연상시키는 가게 모습에 심지어 그곳을 완성시키는 사람들의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꼭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오늘의 깨달음


- 7월 말 삿포로의 여름은 최고 기온이 20도 중반, 최저 기온은 20도 이하까지 내려갈 수 있다. 첫 날 스스키노 거리에 내렸을 때 너무 추워서 게스트하우스 스탭에게 물어봤더니 이런 날씨가 보편적인 것이란다. 오히려 하늘이 쨍하고 20도 후반대로 기온이 올라가는 것이 삿포로에서 흔하지 않는 일이라고. 일주일동안 머무르면서 절반 정도는 쨍하고 더운 날씨였고, 절반 정도는 살짝 흐리고 서늘한 날씨였다. 반바지나 얇은 원피스만 챙기면 해가 지고 나서 추위에 떨 수 있으니 바람막이나 긴 바지도 꼭 챙기는 것을 추천.

- 징기스칸을 먹으러 가면 그 날 입은 옷에는 고기 냄새가 엄청나게 밴다. 세탁을 할 수 있는 숙소라면 괜찮지만, 만약 아닌 경우 남은 여행 일정의 옷차림을 고려해서 버려도 좋은 옷을 입고 가는 것을 추천.


오늘의 후회


- 징기스칸은 진리이니 많이 먹었어야 하는데- 진짜로 엄청나게 먹었으므로 오늘의 후회도 없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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