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토세공항에서 온천하기
새벽 6시 50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남들은 열대야와 싸우며 잠을 청할 시간에 공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지하철을 탔고, 서늘하지만 딱딱한 공항 의자에서 겨우 눈을 붙였다. 최저가 항공편이라 그런지 만 오천원의 추가금을 지불하고 가장 넉넉한 공간의 좌석을 지정해 앉아왔지만 온몸에 내려앉은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새벽 비행기는 오전 9시대에 삿포로에 도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잘못했다가는 첫 날 무리한 스케줄로 이후 일정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우리는 공항 노숙을 하면서 열심히 정보를 검색한 끝에, 신치토세 공항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춰 공항버스로 이동하기로 합의했다.
여행을 함께하는 것의 의미
이번 여행을 함께할 멤버는 그 구성이 조금 특이하다. 앞으로 자주 등장할지도 모르는 짝꿍을 중심으로 그의 여자친구(바로 나), 그의 동네친구, 그의 후배가 뭉쳤다. 짝꿍과는 이미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서 서로의 여행 스타일을 완벽히 파악했고, 그의 동네친구(K)와 그의 후배(B)와도 함께 여러 번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우리에게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 꾸민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선택을 일일이 상의할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다른 멤버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른 지점이 분명히 발생한다. 그것이 쌓이다보면 결국 폭발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래서 여행은 삶의 축소판이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되 전반적으로 조금 느리고 여유있는 일정을 추구한다.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서로의 스타일을 알다보니 이번 여행을 함께 가는 것이 어떠냐는 우리의 제안에 두 사람 모두 기분좋게 응해주었다.
어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많은 사람들이 K와 B가 커플과 함께 여행을 간다는 것에 대해서 신기한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커플여행 가는 데 왜 네가 끼냐", "그러면 방은 따로 잡아?" 같은 대사를 주로 들었다고도 한다. '커플이 가는 여행은 커플 여행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괜한 눈치를 받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여행은 나와 짝꿍이 정말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이다. 기회와 금전적인 여유만 된다면 무조건 여행을 우선으로 고려할 정도. 그런데 단 두 명의 커플로서 할 수 있는 여행의 경험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몇 사람의 마음 맞는 여행 메이트가 더해진다면 여행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더블룸 또는 트윈룸만 머물 수 있던 여행이 4~6인용 독채에서 머무는 여행으로 바뀔 수 있고, 철도와 버스만 이용하는 금액으로 렌트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니 커플과 함께 가는 여행도 친구 여행이 될 수 있다.
아무튼 비행기에서 옆자리를 바라보니 짝꿍과 B는 잠에 빠졌다. 공항에서 나는 너무 피곤해서 짐이고 뭐고 세상 모르고 잠들었는데, 그 시간동안 두 사람을 짐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술을 홀짝이며 깨어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좌석이 좁고 바로 뒷 자리에서는 꼬마 아가씨가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잠은 포기하고 게임이나 하자. 비행기 모드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무료할 때, 책을 읽기에는 집중이 안 되고 몽롱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아야 할 때 나는 아직도 어김없이 캔디 크러쉬를 켠다.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져 간 추억의 게임을 계속하다보니 이제 2680판을 넘어가고 있다. 다섯번의 목숨을 다 쓰고도 원하는 판을 깨지 못하면 핸드폰 설정으로 들어가 날짜를 변경한다. 그렇게 여러 날을 뛰어넘어 게임을 하다보니 창문으로 강렬한 햇빛이 들어온다. 창 밖을 보니 구름 위로 보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새벽 비행기를 타면 좋은 점. 구름 위에서 가장 먼저 태양빛을 만질 수 있다. 몽글몽글한 것이 양털을 깎고 남은 털뭉치들을 모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파도 끝 하얀 거품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기도 하다. 눈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간직해보려 사진을 여러 장 찍어보지만 핸드폰 카메라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보이는 만큼 담아지지 않아 아쉽다.
그 날 이후로 무심코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갤러리를 들어갔더니 비행기에서 찍었던 하늘 사진이 가장 먼저 뜬다. 생각해보니 게임을 하느라 핸드폰의 날짜를 며칠 뒤로 설정해 놓아서 그렇다. 덕분에 핸드폰 갤러리를 확인할 때마다 미래를 달리며 찍어놓은 구름 위 하늘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약간의 편법으로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사진. 사실은 이미 봤던 하늘이지만 볼 때마다 또 설렌다.
드디어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
삿포로의 인기는 겨울만큼이나 여름에 높아진다. 삿포로를 대표하는 축제로 겨울의 눈 축제와 여름의 맥주 축제가 손꼽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보다 서늘한 기온에 기나긴 광장에서 성대한 맥주 축제가 열리니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사실 직장에서도 올 여름 삿포로로 여행을 간다는 사람을 세 명이나 만났다.
그러다보니 신치토세 공항의 입국 수속도 그 어느 때보다 붐빈다. 최대한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지문 스캔과 얼굴 촬영은 기계로 끝내면 직원이 여권과 정보를 확인하고 입국 허가증을 붙여주는 2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겨울 눈 축제 기간에 삿포로를 찾을 때만 해도 지문을 스캔하는 기계가 8~10대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18대나 운영 중이었다. 그야말로 대목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신치토세 공항으로 쏟아진다고 해서 입국 심사가 대충대충 진행되지는 않는다. 간단한 대화는 물론이고 3~4명 중에 한 명꼴로 짐가방을 다 펼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배낭에다가 24인치 캐리어까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누가봐도 '공항에서 노숙했어요' 티 나는 몰골을 하고 있자니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나보다. "며칠 있어요?", "금 있어요?" 등의 최소 질문만 확인하고 패스. 여행을 그렇게 다니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짐가방 수색을 당한 적이 없어서 '나는 이유없이 신뢰가 가는 프리패스상인가보다'라고 내심 믿고 있었는데 오늘도 그 믿음에 한 표 더해진다.
신치토세 공항에는 꽤나 좋은 온천이 있다
전날 밤 12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으니 딱 10시간 정도 지나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쪽잠을 자기는 했지만 멤버별로 느끼는 피로도와 체력이 다르니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충분히 쉬어가기로 했다. 올해 겨울 삿포로에 왔을 때 머물렀던 카락사 호텔에서 대욕장을 즐기면서 피로를 풀었던 추억이 있기에 근처 온천을 찾아보다가 공항에도 좋은 온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숙박도 함께 가능하지만 온천만 할 경우 1인당 1,500엔. 탕 종류도 다양하고 한국의 찜질방처럼 제공되는 옷을 입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다는 평에 우리의 여행은 공항 온천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아쉽게도 사진은 입구를 찍은 것이 마지막이다. 올해 3월 공항 온천을 이용한 블로그 후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참고로 들어가면 우리 나라 찜질방 스타일의 실내복 외에도 알록달록하게 예쁘 유카타 10여종도 준비되어 있다. 꼬마 아이들이나 커플들이 유카타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보기 좋았다. 물론 나는 세상 편한 찜복을 선택했지만.
공항 온천을 이용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탕이다. 온천은 5개의 탕과 2개의 사우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을 넣으면 '으악' 소리가 나오는 탕(45도 이상)과 상대적으로 마음의 위로가 되는 탕(40~43도 사이)과 냉탕이 실내에 있고, 비슷하게 뜨뜨미지근(40도 정도)한 두 개의 노천탕이 있다. 그 중에서도 바위 베개에 뒷목을 올리면 온몸을 뉘이게 되는 노천탕이 특히 좋았다. 우리가 도착한 날 삿포로는 태풍이 온 듯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는데 그런 날씨에 노천탕에 누워 있으니 온몸이 노곤노곤 무장해제되면서 피로가 풀리는 것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리니 황토백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만남의 장소로 나왔다. 회백색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남성 멤버들은 이미 만남의 장소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편안함을 느끼는 '물리적인' 시간이 어찌하여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이십 몇 년 전부터 생각했던 인류의 미스테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얼른 그들의 수다에 합류하며 시원한 홍차를 한 잔씩 들이마셨다. 탕에 들어가니 온몸의 피로가 촤르르 풀어지더라,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고 B가 말했다. "누나 아까랑 얼굴빛이 달라졌어요." 평소 같으면 와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싶었겠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다. 응 나도 알아, 웃음웃음.
공항 온천은 굉장히 본격적인 규모라서 2층 만남의 장소에서 1층으로 내려가니 한쪽에는 레스토랑이, 다른 한쪽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방들이 나온다. 온천으로 오는 길에 아래층 라면도조에서 점심을 먹고 왔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다시 2층 만남의 장소로 올라오니 공용(이지만 사실상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구분된 휴식 공간이 따로 있고 다른 복도로 이어지는 공간에는 추가금을 내면 찜질을 할 수 있는 진짜 찜질방들이 있다. 휴식 공간은 1인용 쇼파가 수십개 늘어서 있는데 쇼파마다 개인 모니터가 달려있어 티비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매력이 있었던 곳은 역시 탕이었다. 남성 멤버들은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든 간에 30분은 더 들어갔다 나오겠다 선언을 하고 다시 여탕으로 돌아왔다. 1차 몸 담그기로 몸에 쌓인 피로를 풀어줬다면 이제는 온천의 기를 받아갈 때다. 뜨뜻한 탕에 몸을 담그면 중탕으로 물을 끓이듯이 서서히 몸 안에 열기가 차오른다. 나한테 맞는 탕을 찾아서 옮기면서 몸 안의 열기를 살짝 식혔다가 다시 올렸다를 반복한다. 대장장이가 철을 달구듯 이것을 반복하다보면 몇 달 묵은 고뿔도 떼어낼 수 있을 만큼 몸이 든든해진다.
약속된 30분이 어느새 후루룩 지나갔다. 노천탕에서 비행기가 뜨고 지는 소리를 들으며 목 위로는 서늘한 바람을, 목 아래로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도 다 지나갔다. 삿포로 시내 근처에 가성비가 괜찮은 목욕탕을 찾아봤을 때 성인 1명에 400엔대가 많았는데, 주로 삿포로역과 한 두 정거장 거리를 둔 곳이었다. 400엔과 1,500엔은 큰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 해당 역으로 이동하는 시간과 짐을 끌고 다니는 시간만큼 피로는 더 쌓일 것이고, 꼬질꼬질함도 추가될 것이었다. 온천을 하고 난 뒤에도 또다시 짐을 끌고 숙소로 이동해야 하는데, 공항 온천을 할 경우 상쾌한 상태로 공항 리무진을 타면 바로 숙소 근처에 내릴 수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삿포로를 왔다면 그 중 반나절을 공항에서 나가지 않고 보내는 것이 아쉬웠겠지만 우리는 7박 8일을 머물 예정이다. 오히려 이렇게 괜찮은 온천을 더 오래 즐기지 못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공항 버스를 기다리는데 웬걸, 버스가 도착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일본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시간표에 정해진 시각에 무엇인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3분 정도 더 기다리니 그제서야 버스가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이 삿포로 공항 옆 비행장에서 에어쇼를 하는 날이었다. 공항을 나오자마 버스 창 밖으로 꼬불꼬불 날아다니며 에어쇼를 하는 경비행기가 보인다. 오호라, 이런 구경도 하네. 어쩐지 도로에 차가 많더라. 도착 예정 시간보다 3분을 초과한 바람에 버스 기사님은 조바심이 나셨는지 미세하게 서두르시는 게 느껴진다. 드디어 삿포로로 들어간다. 스스키노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깨달음
- 신치토세 공항에는 볼거리가 많다. 아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도라에몽 파크도 있고, 초콜렛이 만들어지고 포장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로이스 초콜렛 팩토리도 있다. 초콜렛 팩토리의 끝에는 사람만한 초콜렛 곰돌이도 있는데 사진을 안 찍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 공항 온천의 아래층에는 삿포로에서 유명한 라면집들을 모아놓은 라면도조가 있다. 여행의 시작이나 끝을 여기서 하는 것도 괜찮을 듯. 이치겐 외에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점심시간 피크타임에는 어느 라멘집이나 약간의 웨이팅을 각오해야 한다. 미소라멘을 먹기에는 속이 부대낄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아지사이'라는 가게에 들어갔는데 결과는 대성공. 시오라멘과 쇼유라멘을 여러 종류로 시켰는데 여기는 시오라멘이 제일 맛있는 집인 것 같다.
- 일본에서 온천을 하고 나오면 우유를 마셔줘야 하는데(짱구는 못말려 반복 학습 효과) 충격적이게도 공항 온천 내 자판기에는 병우유가 없었다!! 다행히도 온천을 마치고 나와서 공항 버스를 타러 가는 길목에 바로 우유가 유명한 매장이 나온다. 한 병에 200엔이고 그 자리에서 다 마시고 유리병을 돌려줘야 한다. 북해도는 유제품이 맛있으니까 기회가 되면 다 먹자.
오늘의 후회
- 온천을 더 즐겼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조금 남지만 그랬다면 과유불급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니 오늘의 후회는 없는 걸로.
- 온천 이용 팁을 조금 더 풀자면 카운터에 큰 짐을 맡기고 들어가므로 온천 후 갈아입을 속옷과 옷은 미리 꺼내서 들고 들어가야 온천 후가 유쾌!상쾌!통쾌하다. 여탕에는 건식/습식 사우나 옆에 한국식 세신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 칫솔, 치약, 수건은 기본 제공, 자판기에서 속옷과 클렌징 오일까지 구입할 수 있다.
참고한 사이트
* https://m.blog.naver.com/yeonbin1203/221221181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