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 (1)

인천공항에서 노숙하기

by 하루


심상치 않은 여름이다. 연일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이 경신되더니 이제는 최저 기온이 30도를 넘어가면 '초'열대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원치않는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푹푹 찌는 하루를 오늘은 또 어떻게 넘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일상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해 주는 것은 두 달 전 끊어놓은 비행기표다. 한겨울의 삿포로를 두 번이나 보고서 올해는 반드시 여름의 삿포로를 보고 말 것이라 다짐했다. 맥주축제, 라벤더밭, 청량한 북해도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비행기표를 끊었다. 여름의 절정으로 다가갈수록 삿포로행의 몸값은 끝없이 올라가서 40만원대의 비행기표도 비싼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삿포로로 떠나는 출국편 비행시간이 오전 6시 50분이라는 것. 적어도 4시 반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심야버스(불가능), 공항리무진(불가능), 공항 근처에서 숙박하기(가능), 공항 내 캡슐호텔을 이용하기(가능), 새벽에 택시를 이용하기(가능) 등등 가능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다가 결국은 공항에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밤 12시를 넘어 공항에 자리를 잡으면 3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바로 출국수속을 할 수 있으리라. 여름인데 뭐 어때, 공항이 오히려 시원하겠지. 공항 노숙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이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라는 불필요한 설렘과 초성수기에 시원한 곳을 여행하기 위해 감수해야하는 경제적인 압박이 어울렸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일주일은 집을 비울테니 꼼꼼하게 집을 청소하고 모든 것을 다 정리한 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지하철을 탔다. 공항 도착 예정 시간은 밤 12시. 인천공항행 공항철도는 이 시간에도 빈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처럼 커다란 캐리어나 캐리어보다 큰 배낭과 함께인 사람들과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섞여 이러나 저러나 피곤한 얼굴들이다. 다행히 검암역을 지나서는 자리가 났다. 24인치 캐리어와 10키로쯤 되는 배낭이 다른 곳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신경쓰며 삿포로 여행 (언제나 그러하듯) 벼락치기 검색을 계속했다. 6시 50분 출발할 비행기는 10시가 넘어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숙소 체크인은 오후 3시. 꽤 많은 시간이 빈다. 삿포로 여행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인천공항 벤치에서 노숙하기


인천공항 제1터미널역 도착 12시 5분. 예약해 놓은 와이파이 도시락을 찾으러 공항 1층으로 이동하면서 좌우로 열심히 눈을 굴리며 노숙할 공간을 찾아본다.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공항을 들어가기 전 준비된 벤치부터 이미 사람들은 밤을 버틸 준비를 시작했다. 와이파이 도시락을 찾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몇 년 전 우리가 목격했던 작은 기업의 움직임이 이제는 얼마나 당연하게 여행 준비의 일부로 들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커졌는지 감탄했다. 이제는 외국인 여행객이 한국 여행을 위해 대여하는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역시 좋은 아이디어는 강하다.


와이파이 도시락까지 수령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항 노숙을 준비할 차례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물과 과자를 조금씩 사서 식량을 준비하고 일단 티켓팅 카운터와 가까운 3층으로 올라갔다. 밤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눈에 보이는 벤치는 이미 대부분 노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A, B 카운터는 전체가 가림막을 치고 운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B 카운터 앞이었을 벤치 중에서 비어있는 곳을 찾았다. 누울 수 있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이미 나는 기진맥진이었다. 저녁부터 몇 시간을 청소하고, 여행짐을 싸고, 그것을 끌고 쉴 틈 없이 공항에 도착했다. 등만 뉠 수 있다면 바로 잠을 잘 수 있는 상태였다.


배낭을 베게삼고 누워 준비해 온 얇은 담요를 덮자마자 잠이 온다. 나무로 코팅된 의자는 딱딱하고 좌석이 끊어지는 지점에 허리가 위치하지 않도록 자세를 조정해야 하지만 피곤하면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안 됐다. 주변 벤치에 누워있는 분들은 이미 흥겹게 코를 골고 있다. 이렇게 코고는 소리가 크게 나면 잠드는 데 힘든...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잠이 들고 있다.


두 시간 정도 꿀잠을 자고 나니 공항 직원분들이 청소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쓱싹쓱싹'이 아니고 '부우우우웅'. 아련하게 다가오다 우렁차게 지나가는 '부우우우우웅' 소리가 몇 번 반복되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채 잠을 깬다. 공항 노숙을 결심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그곳에서 자고 있을텐데 각자 다른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일어나려면 알람 소음이 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다들 피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끄러운 알람 소리도 꿈처럼 들리고 적당한 시간에 청소하는 소리가 잠을 깨운다. 결과적으로 알람이 필요없었다. 새벽 3시 반, 혹시나싶어 카운터를 확인하니 다행히 카운터가 열렸다. 바람같은 속도로 수하물 맡기기 → 몸 수색 → 자동출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4시가 조금 넘었다.


공항은 넓고 몸 뉘일 곳은 많다


2시간 안 되는 시간을 어디서 보낼지 방황하다 자연스레 11번 게이트 위로 향했다. 인천공항에서 24시간 운영하는 라운지를 검색하니 딱 하나, 스카이허브 라운지가 나왔다. 마티나 라운지는 운영시간 자체가 07:00-21:00라고 검색되지만 스카이허브 라운지는 00:00-24:00이라고 뜨는데, 다른 블로그 후기들을 참고했을 때 실제로는 24시간 운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라운지 입구에 도착했더니 들어가서 쉬는 것은 가능하지만 음식은 준비되어 있지 않아 간단한 스낵류만 먹을 수 있고, 운영준비 때문에 6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야 한단다. 일행 셋 중에서 두 명만 PP카드가 있었기에 한 명은 금액을 지불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앉아있는 것' 말고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고 그마저도 시간 제한이 있다고 하니 일단은 후퇴.

그런데 스카이허브 라운지에서 조금만 더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더니 보물 같은 공간들이 연달아 나왔다. 곳곳에 푹신한 쇼파와 넉넉한 좌석들. NAP ZONE이라고 아예 잘 수 있는 1인용 쇼파가 40개 이상 준비되어 있다. 빈 쇼파에 누워 편안하게 1시간 반 정도 눈을 붙인 뒤 6시 넘어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제 3시간 반을 날아가면 드디어 삿포로의 여름을 만난다. 비록 딱딱한 의자에서 자느라 몸이 쑤시고, 제주항공 좌석이 좁아 옆사람과 딱 붙어가고, 뒷좌석 꼬맹이는 끊임없이 울어대고, 원하든 원치않은 짠내투어 흉내를 내야하지만. 뭐 어때, 삿포로의 여름을 만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오늘의 깨달음

- 새벽 출국이라 전날 밤에 노숙을 할 계획이라면 와이파이 도시락을 2,500원(하루치) 더 지불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와이파이 도시락은 출국시간 4시간 전 부터 수령 가능하다는 원칙을 내세우는데 2,500원을 더 지불하면 하루전날 아무때나 받아서 동선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 그나마 새벽 6시 전에 들어가기라도 가능한 스카이 허브 라운지는 인천공항 동편, 11번 게이트 위에 있다.

- 노숙을 하려면 최대한 일찍 출국수속을 하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와 잠을 더 잘 것. NAP ZONE도 경쟁이 치열할 것 같지만 다들 새벽 비행기 일정 때문에 잠깐 눈을 붙이는 거라 의외로 금방 빈 자리가 난다. NAP ZONE 앞에도 명당 자리가 많다.


오늘의 후회

- 장기 여행을 앞두고 대청소는 미리미리 하자. 공항 출발 시간이 늦다고 출발하는 날 청소했다가 여행도 가기 전에 온몸이 피로에 쩔어 최악의 컨디션으로 첫 날을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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