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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Dec 30. 2019

이야기의 힘

매리 린 브락트의 『하얀 국화』를 읽고

  『하얀 국화』는 언니 ‘하나’와 동생 ‘아미’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만주의 위안소로 끌려간 여성과 남겨진 가족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1943년 제주 바다에서 물질을 하던 하나는 일본군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가득 태운 배와 기차에 실려 만주의 위안소로 끌려가게 된다. 눈앞에서 언니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아미는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제주에서 해녀로 살아가고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자식들을 보러간다는 핑계로 서울에 올라가 수요집회에 나간다. 평생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언니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제주해녀물질     


  하나와 아미가 ‘해녀’라는 설정은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하나가 해녀로서 태어나는 순간, 제주에 내려오는 전통대로 해녀 굿을 치르고 나서 하나가 어엿한 해녀로서 자격을 갖추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제주에서 해녀로 산다는 것은 여성들이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삶의 터전을 일구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1943년도는 언어부터 교육까지 모든 권리를 일본에게 박탈당한 시기였으므로 자립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해녀의 삶이 더욱 큰 의미를 지녔다. 하나 역시 해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모리모토 하사가 끌고 간 경찰서에서도 하나는 자신이 해녀라고 외치고, 다른 소녀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을 때도 이름 다음으로 해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가 사라진 후 아미도 엄마의 뒤를 이어 해녀가 되었다. 그런 아미에게 물은 삶의 터전이자 정신적 고향이었다. 어두컴컴한 물속은 자궁처럼 고요하고 편안하며 그 속에서는 아픈 다리도 불편하지 않았다. 물질을 하는 여자들은 항상 가까이서 물질하는 동료를 살핀다. 친구 진희도 아미와 평생 함께 물질을 하며 그녀의 아픔을 다독여준다. 해녀가 되어 엄마가 걸어온 길을 이어가고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려했던 아미는 도리어 물질을 하면서 아픔을 잊고 동료를 얻는다.


   숨 참기와 침묵하기


   물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숨을 오래 참는 것이다. 바다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깊은 바다 속을 들어갔다가 해수면으로 다시 올라올 때는 조급해하지 않고 숨을 참아내야 한다. 너무 빠른 속도로 올라오다가는 정신을 잃거나 물이 들어차 익사할 수 있다. 숨을 오래 참는 행위는 목숨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하나가 물속이 아니라 육지에서도 숨을 참아야 할 때 비극적인 상황의 부조리와 슬픔이 극대화된다. 경찰서에서 하나는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더 나아가 ‘아예 투명해’지기로 마음먹는다. 만주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후부터는 일본군에 의해 강간을 당할 때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숨을 참는 것에 익숙해진다.


   하나가 처음부터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리모토 하사가 하나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뭍으로 데려가는 과정에서 하나는 지지 않고 대답을 한다. 만주의 위안소에 도착해서도 끊임없이 묻는다. 여기가 어디이고, 당신은 누구이고,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다. 사쿠라의 방에 갇히고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할 때도, 살려달라고 말하고 비명을 지른다. 케이코가 위험을 무릅쓰고 방에 들어올 때까지 하나는 내리 사흘을 울었다.


   그런 하나가 숨을 참기로, 소리 내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주목받고 누구인지 드러나는 것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했다. 가족이 모두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접수대장에도 가명을 기입해 정체를 숨긴다. 이름과 가족을 지움으로써 발견될 가능성과 돌아갈 가능성을 지워버린 것이다.


   만주에 도착한 뒤 숨을 참는 행위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했을 때 인간은 본능적인 반응을 보인다. 자신이나 주변의 실제에 대한 감각이 변해버리거나 기억을 잃고 회피하는 등의 반응을 예로 들 수 있다. 일본군에 의해 강간을 당할 때마다 하나는 숨을 참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는 자신을 분리했을 것이다. 숨을 참는 동안은 자신의 존재를 지운 것이다.


   너무 오래 참아야했던 이들을 위한 메시지


   작가 매리 린 브락트는 하나와 같은 여성들이 50년도 넘게 침묵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녀는 어머니가 한국 출신이지만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고 역사를 다루는 교육과정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 런던으로 이사한 후 영국 뉴스를 통해 위안부 여성의 존재를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무시되었던 이유가 피해자가 여성이고 피해 내용이 강간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성범죄를 겪고 살아남은 여성에게 뒤집어씌워지는 편견들과 사회적 시선이 위안부 여성들을 또 다른 침묵으로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2011년을 살고 있는 아미도 평생 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나라는 이름의 언니가 존재했고 어떻게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일들을 딸 윤희를 포함한 가족들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미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 또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물가에서 하나가 끌려가는 동안 자신은 지켜보기만 했고, 두 번의 전쟁과 비극적인 사건이 반복되는 동안 정의를 외치지 못했다는 것. 그 결과 ‘나만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침묵해왔다.


   나서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은 부끄러움. 이것은 아미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가슴 아픈 역사를 마주해야 하는 모두에게 작가는 윤희의 입을 빌려 말한다. “언니가 어쩔 수 없이 위안부가 되었다고 해도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그 덕분에 엄마가 살았다고 해서 수치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수치스러운 일을 한 건 일본이죠.”


   두 번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인 윤희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주는 인물이자 작가의 분신처럼 보인다. 윤희는 원하는 일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자신의 보금자리를 키웠다. 해녀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대대로 물질을 이어가는 것이 운명처럼 여겨졌지만 윤희는 그것에 순응하지 않았다. 몇 대를 이어서 내려온 것인지 모를 해녀의 삶이 윤희로 인해 끊기게 되었지만 아미는 딸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딸을 자랑스러워 할 뿐이다. 윤희는 아미가 죽고 난 후에도 소녀상을 찾아가 하나의 이름을 되찾아준다. 그런 윤희를 통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돌아올 수 없었던 인물들이 잊히지 않고 기억될 것임을 암시한다.


   존재를 발견하고 기억하는 방법


   1943년 제주를 떠나 만주와 몽골에 이르는 하나의 여정과 70년의 세월을 보내고 서울의 수요집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미의 여정은 결국 ‘하나’의 이름을 찾는 과정이다. 남겨진 가족들을 걱정하며 경찰서에서부터 지운 이름. 만주의 위안소에서 ‘사쿠라’로 대신했던 이름.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이름을 잃고 지내야만 했던 하나는 자신을 한 명의 인간으로 따뜻하게 맞아준 몽골에서야 조심스럽게 이름을 꺼낸다. 알탄의 어색한 발음을 정정해주며 ‘하나’라는 이름을 알려줄 때, 이 세상에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드러난다.


   아미의 오랜 친구 진희 또한 이야기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와 해녀들을 동물원 짐승 보듯이 보는 것이 싫다는 아미에게 진희는 말한다. “(저들이)친구들한테 우리가 이렇게 산다는 소문내고 뭘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겠지. 누군가 우리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가 영영 사라질 리는 없지 않겠냐.” 작가는 ‘제법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진희의 입을 빌려 오랫동안 침묵한 위안부 피해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활발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이야기됨으로써 영원히 남을 수 있다. 사건과 문화, 그리고 하나의 존재는 누군가의 입에서 발화되고 그것이 끊임없이 전해질 때 기억될 수 있다. 제주의 해녀 문화는 급격한 고령화와 인원 감소로 몇 십 년 째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으므로 진희와 아미의 대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그러나 소설이 막 시작될 무렵 이런 장면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하고 그것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 그리고 소련군의 트럭 안에서 살아남은 소녀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라도 살아남는 사람이 그들의 이야기를 잘 기억했다가 다른 곳에 전하기로 약속한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간절한 방법이 바로 이야기하고 이야기되는 것이다. 다른 소녀들의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 이름은 하나야.”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거라고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하나가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결연하게 입을 여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부터 해녀로서의 삶, 고향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남은 두 명의 소녀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 살피는 그들의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2011년을 살고 있는 아미가 수요집회에서 언니의 얼굴을 발견한 것을 보면,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1940년대 몽골과 2011년 서울은 너무나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는 계속 이야기되어 70년의 세월과 거리를 뛰어넘어 아미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답변을 듣지 못해도 지속적인 수요집회를 이어가는 것,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과 영상으로 남겨 보존하는 것, 소녀상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계속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활자나 영상 매체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가 재생산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얀 국화』의 작가 매리 린 브락트도 이야기를 전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위안부 여성의 이야기로 작품을 쓴다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오랫동안 그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지니고 살 것 같았다’고 말한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위안부 여성의 이야기가 영원히 살아남고 기억되는 방법의 하나로 『하얀 국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위안소의 현실과 전쟁상 뿐만 아니라 제주의 해녀 문화, 4·3사건까지, 작품에 드러나는 역사적 사건과 배경이 광범위하지만 오랜 시간 정확한 자료 조사를 위해 노력한 것이 느껴진다. 하나의 이야기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던 그녀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가 외국에 나가 살지 않았더라면 위안부 여성의 역경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작가의 말은 한국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노력해야할 지점을 알려준다. 외면하고 있었던 역사의 한 장면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얀 국화』와 같은 작품을 읽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매리 린 브락트는 이것을 ‘한국의 위안부 여성과 해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 세계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국화』를 읽고 책 속의 하나와 아미의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알탄네 가족은 계속해서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하므로 하나는 아마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고 자신만의 물질을 이어갔을 것이다. 아미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은 윤희도 레인과 함께 자신만의 물질을 이어갈 것이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위안부 여성에게 바치는 추념의 꽃과 상징으로 『하얀 국화』를 써내려갔듯이 나 또한 그분들의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갈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그리하길 빈다.



*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제3회 한민족 이산문학 독후감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글을 이곳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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