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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pr 21. 2019

성 토요일

금요일의 고난과 부활절의 승리 가운데 있는 완전한 죽음, 토요일

이번 주는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눈 후, 고난을 당하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리고 3일 후 부활하는, 성탄과 더불어 가장 큰 절기이다. 40일간의 자기 참회와 낮아짐을 통해 신의 용서를 구한 후, 이 마지막 한 주는 특별히 교회는 예수의 고난에 온전히 동참한다는 의미로 여러 해 동안 금식과 기도 등의 영적인 생활을 강조해왔다.

개신교의 사도신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가톨릭 교회, 그리고 초기 교회에서 사용한 사도신경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내려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있다. 가톨릭의 카테키즘에서는 삼일 동안 예수께서 지하세계로 내려가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완전히 죽은 신. 신의 죽음.

완전히 임재하고, 완전한 사랑, 완전한 능력을 가진 신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완전히 죽은 그 날.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종교.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은 다르기를 바라보지만 어떨는지는 내가 그 곳에 없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예수는 내일이면 부활한다. 그의 태어남 만큼이나 미스터리하게 죽음을 이기고, 사망의 돌문을 열고 삶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과 40일을 보낸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하늘로 승천한다. 이 예수가 더욱 유명하고,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이다. 자랑스럽게 승리한 우리의 승리자, 구원자 예수.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우리의 메시아.

그러나 나는,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과 승리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죽음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통 없는 부활은, 실패 없는 승리는 그 참된 의미와 깊음을 퇴색시킨다.


지난 몇 년간 성 토요일은 내 뇌리에 깊이 박히는 신학적인 화두였다. 

특별히, 2014년 4월 16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틀 전에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으로, 성 토요일의 "신의 죽음"은 내 삶에 '살아' 들어왔다. 

전 세계에 타전된 충격적인 이미지의 세월호는 고통과 죽음 그 자체였다. 아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구출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그럼 그렇지. 그렇게 아이들이 쉽게 죽지 않겠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라고 생각하며 안도했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다시 전 세계로 전해진 충격적인 진실, 몇 백명의 아이들이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는 소식-


CNN 뉴스 속보를 타고 나오는 세월호의 거꾸로 뒤집힌 채 가라앉는 선미의 마지막 모습은, 그야말로 '신의 죽음'이었다. 모든 이들이 망연자실하게 바라본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이었다. 우리의 신이 우리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어리고 이뻤을, 활짝 웃는 웃음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봄을 가져다주었을 그 생때같은 목숨들이 산 채로 매장당했던 날, 우리는 신의 죽음을 보았다. 모든 곳에 임재하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아름다운 신이 함께 매장당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의 아름다운 신이 우리의 아름다운 아이들과 함께.


천주교에서는 성 토요일을 대침묵일(Great Silence)라고 부른단다. 신이 침묵한 날이라는 의미이다.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 것을 내버려두신 하나님. 3일 후에 부활할 것을 아셨지만, 예수가 숨을 거두던 순간 해가 가리고 천둥이 진동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은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안다고 분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기독교는, 그리고 모든 종교는 신비하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품고 있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신의 영역에 남기기에, 우리는 종교를 신비하다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신비는, 가끔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질문을 남기기도 한다. 세상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를 통틀어 항상 물어온 질문- "왜?(Why?)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을 우리는 아직도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리고-그 노력이 우리를 좀 더 사람답게, 세상을 좀 더 살만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묻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의 공간을 허락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나는 이 작은 공간에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는 부활했다.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믿는 신비이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자유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완벽한 어둠, 완벽한 침묵, 창자가 끊어질 같은 고통을 이기고, 그는 우리에게 죽음이, 고통이, 부정의와 불의가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직접 이야기한다. 우리도 언젠가 그와 함께 부활할 것임을, 신비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허락된 것임을- 그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내가 믿는 예수이다. 지금 우리의 고통이,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살아돌아올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 그래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작은 희망을 살포시 얹어준다.


오늘은 대침묵일 성 토요일이다.

예수가 함께 죽어간 세상의 악과 불의, 고통과 슬픔을 예수와 함께 묻고,

예수께서 경험하셨을 완벽한 죽음을 겪는 이 세상에 

오늘 하루 정도는 완벽히 애도하고 슬퍼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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