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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ug 04. 2018

나란 무엇인가

#스터디 에세이



I am who I am/ I am what I am.
(나는 나 자신이다/ 나는 나다)


나는, 여러 개의, 수억, 수만의 분자가 모여 이루는 화학적 결정체이다...  

나는, 한국이라는 문화에서 나고 자라 한국의 문화를 입고, 그 위에 미국의 문화를 새롭게 입힌 하이브리드 문화 혼합체이다...

나는, 딸이고, 언니고, 한국인이고, 이민자이고, 조카인, 여러 관계가 설정하는 이름을 껴안은 관계 속의 한 구성체이다...

나는, 매일 이루어지는 약 300여 개의 결정 속에서 일관적이지 않은, 심지어 충돌하는 결정을 내리는 나 자신의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한 사람이다...

나는, 안주와 모험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항상 모험에 마음이 끌리지만 두려움에 포박당한 나머지 항상 안주를 선택한,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선택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반푼 이이다...


카약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까지 모험을 해보고 싶지만, 발이 닿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심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 결국 카약이 흔들리고 마는 내가 나인가, 그래도 혼자 호숫가에서 카약을 밀어 호수에 띄우고 혼자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는 내가 나인가. 


누가 '나'인가. 무엇이 '나'인가.

남이 보는 내가 나인가, 내가 보는 내가 나인가. 


마치 양파를 반으로 자르면 여러 개의 레이어가 층층이 보이듯이, 나라는 '것'을 반으로 자르면 그 면에 수많은 아래층들이 층층이 보일 것이다. 그 층들 중 어느 층을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 결정체인 내가 나를 결정하는 무엇일까.

한국을 그리워하는 노란 피부의 내가 나인가, 아니면 미국 햇살에 태닝 된 갈색 피부를 가진, 하루 대부분을 영어로 생활하는 내가 나인가. 

딸, 언니, 한국인인 내가 나인가, 아니면 이민자이고 외국인 노동자인 내가 나인가. 

혜원이 나인가, 아니면 소피아가 나인가.

이 모든 것이 나인가, 아니면 어느 것도 내가 아닌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나'를 정의하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상의 질문은 오랫동안 내 영혼이 싸워오던 질문이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나를 정의하는 것이 어려웠고, 이는 곧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졌다. 내가 나를 정의하는 그다음 순간, 내가 내린 그 정의를 반대할 수 있는 다른 정의를 맞닥뜨렸고, 이는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한 정의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질리도록 기나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의 씨름이 이어졌다.


나는 아직도 나를 '발견'한다.


한동안 외향적인 줄 알았는데, 나는 본래 매우 내성적인 사람인 것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시절 학생회 임원으로 일하고, 동아리 회장으로 일했던 탓에 선생님들과 친구들, 선후배 모두와 두루두루 친했던 나는 내가 당연히 외향적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대학을 들어가면서 나는 낯을 심하게 가리고, 편하게 마음을 놓고 상대를 사귀는데 매우 오래 걸리는 사람인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후 오랫동안 내성적인 성격 탓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가장 재미난 것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도 최근 발견했다. 낯을 가린다고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었던 것인데, 나는 그 둘 사이의 정의를 혼동했고, 정의의 혼동은 내 정체성에 대한 착오로 이어졌다. 

혹은, 나는 오랫동안 내가 매우 약하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여전히 맞는 정의다), 이제 보니 약하고 예민하지만, 나는 아무 도움 없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올 배짱을 가지고 있었고, 지난 십 년간 살아남는 억척스러움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울며불며 '간신히' 생존했지만, 어쨌든 생존했지 않은가? <부모 도움 없이 해외에서 공부하기> 같은 이름으로 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 약해빠진 나약한 나라는 실망스러운 정의에서, 실은 그렇게 예민하고 유약한 성정을 가졌으면서도 밀어붙여서 목표한 데까지 이루는 어딘가의 근성도 가진 '나'로 정의가 조금 바뀌었다. 이렇게, 나는 끊임없이 나를 발견한다.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남들이 나를 믿지 않을 때, 나는 그들을 믿을 것인가, 나를 믿을 것인가


나는 한국에선 꽤 똑똑한, 장래가 유망한 학생이었는데, 미국 대학원에선 중학생보다도 페이퍼를 못 쓰는 동방의 작은 나라 출신 이름 없는 학생이 되었다. '똑똑한 학생'에서 '가망 없는 학생'으로 내 정체성이 움직이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 내면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진짜 너는 무엇이냐?" 똑똑하고 장래가 유망한 그 학생이 너인가, 아니면 몇백 페이지의 책을 밤을 새워 읽어가도, 서론 몇 페이지만 읽고도 유창하게 자신의 '썰'을 푸는 미국애들 보다 못한 그 학생이 너인가. 내가 믿는 너를 믿을 것이냐, 타인들이 생각하는 너를 믿을 것이냐는, 생각보다 매우 지독한 싸움을 선사한다. 한없이 낮아지는 내 자존감을 끊임없이 정신 차리라고 꾸짖고 일으켜 세우며, 타인의 박하디 박한 평가에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내가 무엇"인지를 내 세계 안에 구축해 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쉽지 않다'는 간단한 단어 하나로 표현하기에는 부서진 내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데 걸린 시간과, 뭉그러진 내 정체성을 다시 그리는 밑그림 작업에 에너지가 한스러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것은 항상 선택을 포함한다. '나'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포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어날 때 이미 주어지는 가족이라는 틀도 결국 우리가 나 자신을 구성하는 구성요소에 넣을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문제이다. "What constitutes me?(무엇이 나를 구성합니까?)"라고 꾸준히 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는 까닭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내 선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서 참 아름답다고 주위에서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녀는 아무리 보고, 두 번 보아도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거울 속의 그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코와 진짜 흉측하게 파인 여드름 자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는 아름답다'라는 선언을 거절하고, '나는 못생겼다'는 선언을 선택한다. 객관적으로 아름답다고 아무리 이야기해주어도, 자신의 선택이 포함되지 않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결국 나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그렇다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항상 나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은 '나'이다. 세상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나 자신과 불행하면, 그 사람은 불행하다. 타인을 기쁘게 하느라, 나는 불행하게 내버려두게 된다. 타인의 날 선 말이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은  '내가 상처 입힐 수 있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내가 든든한 방패를 들고 있다면 타인의 검은 너무 무뎌 내 방패를 뚫을 수 없다.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타인의 말에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마음에 기준이 있다. 무게 추는 항상 '나'에게. 가장 좋은 인심은 항상 '나'에게 써준다. 쓰디쓴 충고의 핵심만 추리고, 나머지는 '내'가 상처입지 않게 가지를 쳐내어 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것이다. 세상을 얻고 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보다 못하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고 한다. '규칙과 가치'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되고 규격 안에 맞는 삶을 살기를 강요당한다. 미셸 푸코가 꼭 이런 데 쓰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푸코의 파놉티콘은 우리가 현대 사회에 가진 '규칙과 가치'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나는 느낀다. 결국 우리가 가진 기준이 우리를 규격화되게 하고, 기준 자체가 권력이 되어 나로 하여금 '나'가 아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만 역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그 세계의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 한 픽셀로서의 나가 아닌, 진짜 '나' 자신이 되려면, 내 생각엔, 나는 나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간혹 사회의 '규칙과 가치'를 위배할 지라도 말이다. 물론 모든 규칙과 가치를 위배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많은 규칙과 가치는 의심해볼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여자는 조신해야 해", "남자는 울면 안돼". "아이는 어른 말씀을 잘 들어야지"와 같이 우리 사회를 은연중에 조직하는 간단한 규칙들이 우리를 속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왜 조신해야 하고, 남자는 왜 울면 안되며, 아이는 왜 어른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규칙과 가치'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심이 타당한 이유를 내포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나는) 배짱을 가지고, '그릇된 규칙과 가치'를 넘어서는 '나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그래서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해보자. '나'는 나 자신의 선택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할 때, 결국 나는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60억 인구 중의 일개미 하나로 존재하는 나도 나이고, 두 딸 중 맏딸인 나도 나이고, 소피아도 나이고, 혜원도 나다. 인간은 하루에 대략 300여 개의 선택을 내리는데, 하나도 일관적이지 않단다.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선택을 내리고, 그 하찮은 선택을 도출해낸 나의 하찮음에 괴로워하는 나도 나다. 꽤 괜찮은, 이타적인 선택을 내린 것도 나이고, 그 이타적인 선택을 한 바로 오 분 후 아주 이기적인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나이다. 그러므로 결국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나는 나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장 큰 물줄기는 아마도 "모든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일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가장 매력적인 단어의 조합이다. 즉 홍상수 감독의 "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심지어 나와 이름도 비슷하다)이라는 제목을 살짝 비튼 것처럼, 나는 "그 누구의 정의도 아닌 나"이다. 이 개인적인 '나'의 가치는 그 누구와 견주어서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매우 고유하고 독특한, 자체 생산한 의미를 창조한다. '나'이기 때문에 세상과 견줄 만큼 귀한 것이다. '나'이기 때문에 세상이 요구하는 (그릇된) '규칙과 질서'에도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조정하는 거대담론이 주체가 아니가 '나'가 철저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마치 개개인 60억이 모두 다르다는, 우리의 지문 같은, 그 독특함- 그 독특함이 '나를 나'로 만든다. 부정보다는 긍정을, 단죄보다는 수용을, 판단보다는 인정을. 나 자신에게 건배의 인사로 건네자.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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