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나는 가장 나약한 존재였다
*여행 시기는 2018년 6월 초입니다.
1시간 여의 비행이 끝나고, 경유지인 보되에 도착했다. 보되 공항에서 페리 터미널까지 이동하여 배를 타고 로포텐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틀어질 운명인 듯했다. 공항에서 항구까지는 약 4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이다. 걸어서 가도 넉넉잡아 1시간이면 충분해 보였다. 배는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미리 찾아본 바로는 출항 45분 전까지 탑승객 등록을 마쳐야 한다고 하니, 적어도 3시 45분까지는 항구에 도착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비행기가 보되에 도착한 시간이었다. 짐을 찾아 거리로 나왔을 땐 3시 20분경이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도착 시간과 달랐다. 비행기가 오슬로에서 다소 늦게 출발해 40분을 연착하고 만 것이다. 제시간에 출발했다면 보되에 2시 40분에 도착했을 것이고, 배 시간까지 1시간 5분이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항구로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고작 25분밖에 남지 않았다. 항구까지 가는 시내버스도 마땅히 없어 보이고, 택시는 요금이 비쌀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걸어가는 쪽을 고수했다. 만약 배를 놓친다 하더라도, 서너 시간 후에 뜨는 마지막 배가 있기에 정 안되면 다음 배를 타기로 했다. 도착 시간이 너무 늦어져 이동에 제약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로포텐에 들어가는 게 최우선 목표니 그 걱정은 잠시 미뤄두었다.
마음을 한결 비우고 나니 갑자기 시간이 뻥 비어버렸다. 보되에서 딱히 할 건 없었다. 로포텐으로 들어가기 전 시간이 남으면 캠핑용품 가게를 둘러보려고 했다. 몇십 분도 아니고 몇 시간이 남았으니 여기서 필요한 물품을 사기로 했다. 터미널까지 걸어가는 중간에 캠핑용품점이 있어 둘러보다가 이소 가스와 비상용 은박 담요, 플라스틱 컵 등을 구입했다. 가게의 뒤쪽이 바로 바다라, 물건들을 사고 나서 잠시 구경을 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 정박한 여객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로포텐으로 들어가는 배인 듯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번 배는 분명 못 탈 거란 확신이 들었다. 다음 배가 출발하기까지 여전히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날씨도 쌀쌀하고 딱히 갈 만한 데도 없으니 터미널에서 시간을 때울 작정이었다.
항구에 다다르자 먼발치에서 봤던 여객선이 눈앞에 커다랗게 서 있었다. 출발까지 20분이 남은 시점인데, 생각과는 달리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람들도, 차들도 아직 배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표를 끊으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터미널은 폐쇄된 건물처럼 썰렁했다. 맞이방에는 한두 사람만이 의자에 턱 걸터앉아 있었다. 여기까진 탑승 직전이니 모두 빠져나가서 그런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카페도 문을 닫았고, 아무리 둘러봐도 매표소라고 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곤 안도했다. 직원이 줄을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표를 끊어주고 있었다. 나도 그 줄 뒤에 서서 기다렸다가 승선자 명단에 이름을 작성하고, 표를 끊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발권이 모두 끝났다. 내가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서서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배로 들어갔다. 뜻밖의 행운을 얻은 것 같았다. 당연히 못 탈 줄 알았는데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마 해운사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정보는 그야말로 '형식상' 명시해 둔 듯했다.
약 3시간의 항해 끝에 로포텐 모스케네스에 도착했다. 날씨는 쌀쌀하고 다소 흐렸지만,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 나는 첫 야영을 하러 서쪽 끝에 있는 오로 갈 계획이었다. 모스케네스 항에서 오 까지는 4km가 조금 넘는 거리. 버스가 있긴 하지만 3시간은 기다려야 해서, 그보단 천천히 풍경 구경을 할 겸 가는 게 낫겠다 싶어 걸어갔다.
애석하게도 흐리고 고요한 날씨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얼마 걸어가지 못해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자잘한 우박으로 바뀌어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다시 비가 맹렬히 내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뚫고 오에 다다랐다. 마을 앞에는 짧은 터널이 있는데, 터널 직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을 따라 호숫가로 향했다. 비가 다시 세차게 내렸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쳤다. 그 틈을 타 호숫가에 배낭을 풀었다. 비 대신 바람이 꽤 강하게 불어 텐트를 치는 데 다소 힘이 들었지만, 감지덕지였다. 펙까지 튼튼하게 박아두고, 궂은 날씨를 잘 견뎌내 주길 바랐다.
오의 한 호숫가에서 맞은 야영 첫날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백패킹이 처음인 나에게 하늘이 과연 이 여행을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을 하는 것 같았다. 강풍은 끊이지 않았고, 그쳤던 비가 다시 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온은 더 떨어졌는데, 주르륵 내리던 비는 어느새 싸락눈으로 바뀌어 타닥타닥 텐트를 두드렸다. 영하의 기온과 흩날리는 눈, 매서운 바람에 차가운 공기가 텐트를 뚫고 올라왔다. 옷을 여러 벌 껴입고 침낭 속에 있으니 보온이 꽤 됐지만, 얼굴은 무방비 상태였다. 침낭에 얼굴을 넣자니 숨쉬기가 답답하고, 밖에 내놓자니 얼굴만 냉장고 속에 넣은 것 같았다.
문득, 이 호숫가에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그래도 백야라 괜찮겠거니 했는데, 밝은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칠 줄 모르는 자연의 공포스러운 합주와 이를 배가시키는 찬 기운이 오감을 자극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애써 잠들려고 눈을 감고 있다가도 뜨길 반복했다. 자비 없는 로포텐의 첫날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괜히 백패킹을 왔나 싶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 속에 가만히 누워 있으니 '내가 진짜 살아 있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태어난 이상 숨 쉬는 것만큼 살아 움직이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일상에선 전혀 의식할 일도, 생각할 일도 없다. 생명을 위협받을 만한 사건을 겪지 않는 이상 이를 의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하지만 로포텐에 머무는 이 첫날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면밀히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단 느낌은 아니었다. 오로지 요동치는 자연 속에서 텐트 하나에만 의존해 있으니, 나도 오롯이 그 자연의 일원이 되어 호흡을 같이 하는 기분이었다. 나와 자연 사이에 경계가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자연 속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였고, 하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쩌면 백패킹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첫날부터 날씨가 궂은 것에 대해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그저 다음날 내가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을지와 같은 과장된 걱정과 주변 풍경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아쉬움뿐이었다. 또 하나, 처음 여행을 계획하며 고대했던 '낭만적인 백패킹'은 이 순간 꿈도 꾸지 못하는 먼 존재였다. 다른 이의 후기를 보며 왠지 재밌겠다며 자연스레 올라가던 입꼬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애써 괜찮다며 억지로 올렸지만, 그때뿐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이 환한 밤이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