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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호 Aug 25. 2023

로포텐 2일차-2. 4시간의 기다림이 내게 남긴 것

한 번은 배를 놓칠 운명이었다

*여행 시기는 2018년 6월 초이며, 글 속 상황들은 현재와 다를 수 있습니다.


부네스 해변까지는 레이네에서 배를 타고 빈스타드로 이동한 후에, 짧은 트레킹을 하여 갈 수 있다. 빈스타드엔 식료품을 구할 곳이 없다고 해서, 배를 타기 전에 미리 간단한 식사를 하고 1박을 하는 동안 먹을 음식도 살 생각이었다. 레이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서클 케이라는 작은 마트가 있는데, 나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 다른 마트가 있나 찾아봤다. Coop이라는 대형 마트가 지도에 떴지만, 3km 떨어진 거리에 있어 당장 갔다 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루를 머물면서 먹을 양식만 있으면 되니 서클 케이에서 간단하게 사기로 결정했다. 

인구가 약 3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 레이네에는 버스터미널과 주유소, 서클케이(편의점)가 한데 모여 있어 정겨운 느낌을 준다.

서클 케이는 우리나라의 편의점 같은 느낌이었다. 가짓수는 적지만 당장 한 끼를 때울 만한 식재료와 햄버거와 같이 그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팔고 있었다. 배 출발까지 40분이 남았으니, 느긋하게 피스케버거 하나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점원은 그 자리에서 빵과 속재료를 조합해 익히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걸 주는 게 아니라 주문을 받는 즉시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0분이 지나 마침내 내 손에 쥐어진 햄버거는 나에게 온기를 불어넣었다. 이 햄버거의 핵심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생선살 패티이다. 두툼하게 한 장 들어간 생선살 패티는 그간 먹던 고기 패티와는 달랐다. 굉장히 고소하면서 담백했고, 식감도 참 부드러웠다. 하얀 소스가 더해져 조금은 달짝지근하고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뿐이랴. 양파, 토마토, 양상추 같은 다양한 채소도 듬뿍 들어있어 햄버거는 더욱 풍부했고, 질 좋은 건강식같은 느낌이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와는 달리, 신선하고 은은한 풍미가 입맛을 자꾸 잡아당겼다. 금세 한 개를 해치우고 나니 하나를 더 먹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물가가 그렇듯 햄버거 하나의 가격이 65크로네라 선뜻 추가 지출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꾹 참고 애써 한 번 먹은 것으로 만족했지만 못내 아쉬움이 밀려왔다..

로포텐 서클케이의 피스케버거


햄버거를 다 먹고 나서, 저녁에 해 먹을 식재료들을 샀다. 냉장식품과 냉동식품 중에는 한 끼 식사로 즉석에서 익히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제품은 없었다. 무엇을 해서 먹을까 머리를 쥐어 짜내어 생각한 답은 결국 라면이었다. 보관도 쉽고, 만들어 먹기도 이보다 더 간편한 게 없으니 백패킹을 하는 동안 점점 '필수 템'으로 굳어져 갔다. 라면만 끓여 먹으면 양도 부족하고 심심할 것 같아, 소세지와 양파를 추가로 구입했다.


배 출발 시각이 슬슬 다가와 서둘러 서클 케이에서 빠져나와 지도상에 표시된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선착장은커녕 여러 사람을 태울 만한 배조차 보이지 않았다. 접안 시설같은 것도 없고,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도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하며 망설이는 사이 예정된 배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다급히 근처를 지나가는 한 건장한 남자에게 여기가 배를 타는 곳이 맞는지 물어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다' 였다. 그러나 나도, 그도 그 배를 직접 보지 않았지만 시간표로 말미암아 배가 떠났을 거란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번 배는 놓친 운명이었으니, 더이상 물어보나 마나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선착장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에 따르면 버스정류장과 서클 케이가 있는 바로 근처에 선착장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질 않으니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300m쯤 걸었을까. 작은 갈림길에 떡하니 꽂혀 있는, 페리 터미널임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이 보였다. 갈림길의 끝에 비로소 선착장이라 할 만한 시설이 나왔다. 돌이켜 보니 버스를 타고 레이네에 들어오면서 창밖으로 노란색 표지판을 보긴 했었다. 그러나 그게 선착장 안내 표지판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던 표지판의 신호를 지나치고 지도만 맹신하다 배를 놓친 결과는 꽤 가혹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가는 노선이 아니라, 다음 배가 무려 4시간 후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로포텐에 입도하는 날 가까스로 배를 놓치지 않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이번에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입도하는 날 배를 놓쳤다면, 이번엔 넉넉하게 시간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배에 올랐을까? 어쩌면 어디서든 한 번은 놓칠 운명이었나 보다.

잘못 찾아갔던 선착장 위치(좌)와 실제 선착장 위치(우). '동네가 작아 괜찮겠지'하며 느긋하게 움직였다가 길을 헤맸다.

 

그렇게 문짝 없는 대합실에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간간히 찬바람이 건물 안까지 쌩쌩 불어와 몸을 훑었다. 다행이라면 날씨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늘에는 여전히 하얀 구름이 가득했고, 때때로 시커먼 먹구름이 흰 구름을 뒤덮었지만 비를 뿌리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잠깐씩은 하늘이 많이 개어 해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로포텐에 들어오고 이틀 만에 본 첫 태양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쉬워 조금 멀리까지 둘러보고 싶었지만, 배낭을 메고 가자니 힘들고 놓고 가자니 영 찜찜했다. 그래서 해가 고개를 내민 때를 틈타 선착장 주변만 맴돌며 작은 골목을 구경하고, 온 몸으로 따뜻한 햇살을 맞는 정도로 지루함을 달랬다. 확실히 해가 모습을 드러내니 그렇지 않을 때보다 체감 기온이 높아 포근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출항 시각이 다가오자 대합실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썰렁했던 대합실은 활기를 되찾았다. 마침내 모든 기다림의 시간이 끝이 나고, 그토록 기다렸던 배가 왔다.

빈스타드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레이네의 페리 선착장
배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둘러본 주변 풍경은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 전력 질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대를 보내도 단 몇 분 후면 다음 차가 들어오는 수도권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차가 오는 데도 괜시리 짜증이 치솟는다. 그래도 그 감정은 다음 차가 도착함과 동시에 휘발된다.


하지만 로포텐에서는 그런 짜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운이 없으면 이렇게 3시간이고 4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그 오랜 시간동안 투덜대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로포텐에서는 여유를 갖고 흘러가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배 뿐만 아니라 버스도 한 번 놓치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대도시이건 소도시이건, 관광 인프라가 잘 구축된 곳이건 그렇지 않은 곳이건 정도의 차이일 뿐 여행에는 늘 변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로포텐에서는 특히 그 어떤 여행을 할 때보다 어느정도 예상을 했고 또 예측하지도 못한 난관들을 많이 마주했고, 배를 놓친 것 역시 그 중 한 가지였다. 마음을 놓고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참 많이 쳐다봤다. 똑같은 하늘을 그렇게 빈번히 오랜 시간 쳐다본 것은 그해 1월 말 스웨덴에서 오로라 헌팅을 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 구름 사이로 반짝이며 빛나던 햇살이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에는 마냥 의미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따스한 레이네의 하늘 풍경이 알게 모르게 추억 속에 남아 생생히 떠오른다. 마치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운 것 같다. 4시간의 기다림은 작은 추억의 씨앗으로 남았고, 그 씨앗을 가슴에 품고 부네스 해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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