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부네스 해변은 오로지 나를 위한 포토존이었다
밤새 수평선을 넘어갈 듯 말듯하며 떨어지지 않던 해가 다시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텐트의 문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공기가 차갑고, 구름도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첫 야영때 맛봤던 끔찍한 날씨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비나 눈이 안 오는 것만으로도 텐트 안 생활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남은 기간동안 이 정도로 괜찮은 날씨를 다시 맛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텐트 밖으로 완전히 나와 온 몸으로 아침 공기를 맞았다. 내가 머문 곳에서 뒤쪽으로 15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언제 왔는지 모를 다른 캠퍼가 쳐 놓은 텐트가 작게 보였다. 순간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제 내가 타고 들어온 배는 막배였다. 배가 끊긴 후 외부에서 이곳으로 오러면 아주 험난한 산을 타고 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 근처 어딘가에서 1박을 하고 왔단 얘긴데, 그럴만한 곳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근처 산에 올라 야영을 하고 내려온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이 아닌 귀신일 터이다. 텐트를 보는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궁금증이 머리를 쏜쌀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쨌든 이 넓은 바닷가에 나같은 동지가 한 명 더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텐트의 주인은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인사를 먼저 건넬 겸 텐트에 다가갔다. 그러나 어디 갔는지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인사조차 하지 못했고 궁금증도 풀지 못했다.
레이네로 돌아가기 전에 남은 시간을 그냥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무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휴대용 삼각대를 가지고 왔으니 이를 적극 활용해 ‘인생샷’하나쯤은 남기고 싶어졌다. 산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다양한 포즈를 취해 보고, 제자리에서 열심히 뛰며 점프 샷에도 도전해 봤다. 좋은 구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헉헉대며 뛰었지만 결과물이 영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러곤 나와 텐트가 함께 나오는 투 샷을 담았는데, 그나마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여행을 다닐 땐 관광지에 가거나 멋진 풍경을 보면 셀카는 한두 장 무심히 탁 찍고 말았다. 기록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작은 삼각대를 멀리 놓고 찍는 건 더더욱 남들만의 이야기었다. 소매치기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남자 혼자 그러자니 또 얼쯤했다. 잘 나온 셀카 사진이 없더라도, ‘내가 있었던 곳의 풍경을 남겼으니 됐지’라며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부네스 해변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이곳에서 멋진 풍경 아래 나밖에 없으니 욕구가 치솟았던 걸까. 그렇게 30분간 찬 바람을 맞아가며 셀카 삼매경에 빠졌다. 내가 나를 찍는 행위가 이렇게 재밌는 것인지는 부네스 해변에서 거의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주섬주섬 텐트를 정리해서 다시 언덕길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 언덕 정상에선 전날 제대로 보지 못했던 마을 쪽 해안가의 풍경을 실컷 눈에 담았다. 산으로 옴폭 둘러싸인 작은 만은 부네스 해변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만을 따라 옹기종기 자리를 잡은 집들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또 한번 보이는 멋진 풍경에 쉽게 발걸음을 떼질 못했다. 눈으로 한참, 카메라로 한참 담은 끝에야 다시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다다랐을 때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기실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기다린 지 불과 5분이 지나 배가 도착했다. 더 여유를 부렸다간 전날처럼 또 배를 놓칠 뻔했다. 알고 보니 시간표와는 다르게 경유지 순서를 바꿔서 빈스타드에 예정보다 10분 일찍 온 것이다. 5분 일찍 도착하면 되겠지라는 마인드였다면 또 4시간을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