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코로나 시국 음악
일단 현재의 코로나 시국 팩트를 짚고 넘어가 보자. 그 어느 나라보다 간단하고도 정확하고 신속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 시스템을 구축해 전세계의 찬사를 받고 확진자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이단 종교집단에서부터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온 나라가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질병관리본부와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완전히 욕받이가 되어 있다. 물론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언론에서 너무 호들갑을 떨고 사람들이 부화뇌동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각자가 개인 위생에 좀더 신경쓰고 인파가 밀집한 곳에만 가지 않으면 별로 걱정할 거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1% 내외로 치사율이 가장 낮은 암인 갑상선암보다도 치사율이 낮다고 한다. 공포 분위기를 지나치게 확대재생산한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말러 : 교향곡 6번 a단조 "비극적"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빈 필하모닉
그런데 말러 교향곡 6번 a단조 “비극적”을 듣다 보니 이 곡이 품고 있는 의식의 흐름이 지금의 시국을 표현하는데 딱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선 글에서 내가 언급한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는 코로나 시국을 대하는 각자의 자세에 대해 힌트를 주는 느낌이라면, 말러 6번은 이 시국 그 자체를 리얼하게 음악의 언어로 나타낸 서사시라는 느낌이다. 특히 4악장 피날레가 더 그렇다. 일단 전곡을 큰 틀로 놓고 봤을 때, 이 교향곡은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엄격한 구성 안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가감 없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역설이 듣는 이의 혼란을 더 가중시킨다. 엄격한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 안에 말도 안되게 뜬금없이 다른 성격의 두 가지 주제가 등장하면서 듣는 이를 오리무중으로 빠지게 하는 1악장, 달달한 이지리스닝의 느낌을 분명히 주면서도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끔 유도하는 미궁 속의 안단테 악장, 엇박을 마치 메인 박자로 쓰는 듯 남발하면서 심지어 박자지시도 수십 번이 바뀌는 날카롭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스케르초 악장(몇 악장이라고 하지 않고 안단테, 스케르초 악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연주 순서가 달라질 수 있기 떄문이다)을 거쳐 무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지는 피날레 악장으로 오면 말러가 2020년 대한민국을 예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타나는 내러티브가 지금의 시국과 판박이다. 말러의 당시 인생이 사실 그러했다. 이 곡을 쓸 당시에 말러는 인생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런데 천재적인 예술가의 더듬이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에서조차 앞으로 다가올 불행을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 있는 법이다. 말러의 아내인 알마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곡의 피날레에 나오는 세 번의 망치 타격(후에 말러 본인이 스스로 세 번째 해머는 삭제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웅은 세 번의 타격을 받으며 세 번째 타격은 그를 나무토막처럼 쓰러트린다”. 물론 알마의 회고가 신빙성을 의심받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 흐름상 굳이 깐깐하게 팩트체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뛰어난 예술가는 불행을 감지하는 능력이(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소위 말하는 메타인지 능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게 마련이기 떄문이다.
다시 피날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일단 피날레의 인트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미스테릭하게 시작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음악으로 출발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게 되는 제시부의 주제 부분으로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이 곡의 통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텍스츄어가 비교적 명료하며 서서히 뭔가가 정돈되어가는 느낌마저 준다. 물론 다이내믹은 지극히 에너제틱하며 파괴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파괴의 느낌을 아직은 주지 않는다. 제시부가 나타내는 것은 혼란 가운데 있는 어떤 판을 어떻게든 하드캐리하는 느낌이 훨씬 강하며, 말러가 바라보는 것은 마치 슈베르트가 즐겨 썼던 그것처럼 분명히 혼란이 끝나고 찾아올 희망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말러는 발전부의 초장까지 몰고 간다. 그 절정에 트럼펫이 포르티시시모의 숨막힐 듯한 패시지를 D장조의 딸림 7화음으로 제시하면서 종지를 향해 가는 순간에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해머가 튀어나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모든 것을 파괴한다. 마치 복싱 선수가 상대방의 급소를 정확히 노려 훅을 명중시키듯 말이다. 그런데 이 훅을 맞은 음악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말러는 이 타격에 전혀 굴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의 분위기는 표면적으로 좀 소강상태로 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물러설 생각은 없다. 다이내믹만 좀 온건해졌다 뿐이지, 말러는 아예 행진곡의 리듬을 강박적으로 쓰면서 저항하는가 하면, 또 나름의 평화적인 섹션을 능숙한 대위법까지 쓰면서 스스로를 엄하게 채찍질한다. 그런 순간에 또 한 번의 해머가 내려꽂힌다. 이번에는 진짜로 음악의 힘을 빼는 역할을 하는 해머다. 음악의 역동성이 눈에 띄게 저하된다. 그럴지언정 말러는 형식적인 엄격함과 역동성을 놓지 않는다. 이전에 나오던 주제를 조금씩 변형해서 반복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에너지를 유지한다. 이걸 절대음악적으로 위대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결국 본질은 말러의 심지 굳은 의지다. 그렇게 근근이 그러나 심지 굳게 이어지던 음악은 또 세 번째 해머를 얻으맞으며 처절하게 KO패를 당하고 만다. 사실 세 번째 해머는 말러 본인이 후에 소거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해머를 살린 연주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나는 말러의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자신의 불행한 미래를 예견한 말러가 음악에 그것을 100퍼센트 다 드러냈다가는 정말로 그것이 현실화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소위 말하는 “말이 씨가 된다”의 예시일 것이다. 결국은 이 곡을 초연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말러는 그 세 번의 해머 타격에 해당하는 세 번의 메가톤급 불행을 현실로 겪고 말았다(1907년의 첫째 딸 사망,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 사퇴, 심장병 진단).
이 곡의 피날레에 나오는 세 번의 해머 타격(실질적으로는 두 번)은 내가 느끼기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느 정도 퇴치되어가고 있던 시기에 터진 신천지 신도들의 대량 확진 판정을 접한 일반 시민들의 충격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시국이 부디 해머 한 번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 외부적인 변수가 또 발생하면 정말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에 덧붙여 정부와 질본에 주문한다. 말러 6번 피날레의 첫 번째 해머 타격 전후로 펼쳐지는 이를 악문 하드캐리처럼, 그 정신으로 조금만 더 힘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