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엄마 아빠들이 힘든 날, 황금연휴
first world problem
일명 First World Problem - 잘 사는 나라와 형편에서나 존재하는 문제나 불평 거리.
홍콩에서 살며 가장 흔하게 겪는 first world problem은 거의 가사도우미에 관한 일이다. 어디 가서 문제라고 불평했다간 욕먹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지만 여기선 진짜 문제다. 대부분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 헬퍼 - 들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출신으로 홍콩 물가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고 주 6일 근무를 하며 일 년 중 휴가는 7일, 그리고 법적으로 정해진 공휴일(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음력이라 매년 날짜가 다른 중국 명절들)뿐이다. 쉬어야 하는 날에 일을 시키는 것은 불법이고, 일주일에 한 번 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공휴일이라면 그다음 주 월요일이나 다른 날로 대체 휴일을 줘야 한다는 게 고용주가 숙지하고 지켜야 하는 고용법 내용.
올해 10월은 그야말로 헬퍼 쓰는 집 엄마 아빠들이 힘든 달이었다. 월초에 중국 국경절과 추석이 겹쳐서 이틀 연달아 쉬었고, 25일이 중양절이라서 26일 월요일이 대체휴일이 되어 또 이틀을 연달아 쉬었기 때문이다. 이런 황금연휴가 있는 달이면 엄마들 사이에선 불법임을 알면서도 서로 파트타임 헬퍼를 소개하는가 하면 하루치 일당을 얼마를 쳐줘야 헬퍼가 밖에 나가는 대신 집에서 일을 하는지, 시세(?) 같은 걸 공유하곤 한다. 남편과 나는 불법적인 것이라면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방법들은 우리한텐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대신 이런 황금연휴엔 모든 것을 멈추고 아기와 시간을 보내는 데에 100퍼센트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랄까.
홍콩은 출산 휴가가 길지 않고 맞벌이가 많기 때문에 헬퍼에게 아기 양육을 거의 전부 맡기다시피 하는 가정이 많다. 그래서 아기를 돌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많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이틀 내내 아기와 붙어 있는 것이 막막하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일요일만 되면 동네 쇼핑몰이 하루 종일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 아빠들로 붐빈다. 집에서 아기를 데리고 있으면 힘들고 시간은 어찌나 느리게 가는지... 밖에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니면 또래 아기가 있는 집 엄마 아빠를 초대해서 플레이 데이트를 하며 공동육아(?)를 통해 함께 서바이벌하는 방법도 있다.
이번 휴일 둘째 날엔 첫째가 좋아하는 친구와 그 엄마 아빠를 초대해서 시간을 보냈는데, 아주 다행히도 아이들이 함께 잘 놀아줬고, 둘째는 조용히 잠을 잤으며, 우리는 각자 김밥을 무려 두 줄씩 먹을 수 있는 황금 같은 여유를 즐겼다. 아이가 낮잠을 잘 시간이 되어 작별을 하고 나니 벌써 오후. 요즘 술술 빠지는 내 머리카락 때문에 특별히 신경 써서 바닥 청소도 하고 김밥도 말고... 삭신이 쑤시는 오후지만 어찌 됐든 반나절은 살아남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헬퍼가 돌아온다!' 이건 꼭 등산할 때 내려오는 사람들이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시면 돼요~"라고 하는 걸 듣고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돼.'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직 멀었다는 걸 인지할 때의 그 힘 빠짐과 비슷하다. 그렇다. 나는 알고 있었다. 헬퍼가 돌아오려면 아직... 8시간은 더 지나야 한다는 걸.
정신없이 애 둘을 씻기고 저녁도 먹이고 잠을 재우고 나자 물 한 잔 마시며 소파에 앉을 시간이 났다. 앉아서 핸드폰을 보니 엄마들 단체 챗방이 사진과 문자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루를 간신히 살아남은 엄마들이 오늘을 살아남은 비법을 공유했는데 대부분 놀이공원, 섬, 하이킹, 쇼핑몰, 호캉스, 수영장. 헬퍼 없이 이틀 연속으로 육아를 했더니 힘들어서 핸드폰 키보드를 제대로 조준(?) 못하고 오타가 난다며 처지가 비슷한 우리들끼리 농담도 던져본다.
2년 전에는 매년 달력을 챙겨보며 황금연휴가 있는지, 있다면 며칠이나 몰아서 쉴 수 있는지 알아보고 여행 갈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기 바빴는데, 지금은 서서라도 김밥 두 줄 먹을 시간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런 처지가 됐구나. 당분간 황금연휴는 필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