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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Nov 19. 2021

소울푸드 대체용 소울푸드

림,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근데 날씨랑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리 배가 출출할까? 살짝 고픈 배를 부여잡은 김에 오늘은 먹거리 이야기를 해볼까 해.


온몸으로 표출하듯, 난 음식에 아주 진심인 사람이야.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전부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가능하면 밥, 국, 반찬의 구성을 지켜가며 먹지. 생각이나 행동이 한국적이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지만, 그런 내게도 아주 한국적인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입맛. 아재 입맛이라고 하나? 얼큰한 탕, 전골 이런 거 좋아하는 거. 내가 가장 기본이라 여기는 음식이 그래. 그런데 세상 싱싱한 야채가 넘치던 막데부르크에는 한식 재료를 구할 곳이 없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어. 그렇지 않아도 극우주의자가 많다며 외국인들이 기피하는 곳이어서...(심지어 어떤 아시아 출신 유학생은 내게 이런 이야기도 했었어. 자긴 목적지까지 기차를 타고 갈 때 막데부르크나 그 주변에서 갈아타야 하는 연결 편이면 아예 안 탄다고. 기차역 플랫폼에 내리는 것조차 무서웠던 거지.) 한인 마트가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어.


주기적으로 한국에서 받은 고추장, 된장, 간장, 마른미역. 이것들은 내 보물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리 넓지도 않은 내 방에서 가장 적합한 서늘한 자리를 찾아 직사광선을 피해 소중히 보관했지. 어쩌다 베를린에 놀러 가는 날은 아시아 마트에 가는 거야. 기내용 여행가방을 돌돌돌 끌고서 말이지.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하니 냉동식품은 못 사지만 실온에서 보관 가능한 재료 종류로 꽉꽉 채웠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걸 풀어보면 마음이 어찌나 안정되는지. 이 쿰쿰 짭짤 매콤 찐득한 것이 뭐라고. 이 검고 짠 액체가 뭐라고. 그것들만 있으면 내 마음이 그리 편안했어. 이런 걸 보면 정말 소울 푸드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아. 음식 그 자체의 맛과 영양학적 가치, 멋 그런 거 다 빼고 그저 내 혀와 코가 느끼는 감각이 언제 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기억 같은 것을 새록새록 불러오는 것. 그 총체적 프로세스가 소울 푸드 같아. 


내 한국적 입맛에 맞으면서 쉽게 해 먹을 수 있었던 걸로는 자우어크라웃 찌개를 따를 게 없어. 요즘 학생들은 한국에서도 워낙 서구식 식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걸 소울 푸드로 여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시간 그곳에 있었던 유학생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그런 음식이야. 자우어크라웃 한 봉지와 참치캔, 고춧가루와 마늘, 좀 있는 집 학생이라면 한국에서 받은 다시팩으로 우린 육수, 아니라면 한국 엄마 손맛의 비밀 x시다 한 티스푼. 그렇게 보글보글 끓이고 계란 프라이 하나 해서 밥에 얹어 먹는 거지. 한 숟가락 입에 넣고 눈 감으면 그 사이 한국 다녀온 느낌이 든다고. 물론 엄마 김치찌개랑 같은 맛은 아니지만, 한식 재료도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 그 정도면 '앗, 이것은 김치 맛이 아닌가!'하고 기억 속 김치 맛을 다시 내 혀 끝으로 불러내고도 남거든.


그렇게 자우어크라웃 찌개로 김치찌개를 대신 한 지 7년이 지나고 영국 런던으로 이사를 한 후의 일이야. 어느 날 문득 자우어크라웃 찌개가 생각나더라. 런던엔 워낙 한인이 많지. 한국 식당도 많고 한국 식품점, 심지어 분식집까지 있었으니까. 그래서 김치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어. 내가 다닌 대학원에서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사이에도 한국 식품 점이 둘이나 있었으니, 김치를 먹고 싶으면 언제든 살 수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먹는 것 같은 배추를 아시아 식품점이 아닌 일반 슈퍼 마켓에서도 파니까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기도 쉬워졌어. 그렇게 오리지널 김치가 넘치는데, 왜. 김치찌개 생각 대신 자우어크라웃 찌개가 생각났을까.


재미있는 건, 독일에선 그렇게 구하기 쉽고 싼 재료로 만든 자우어크라웃 찌개였는데, 런던에 오니 김치보단 자우어크라웃 제대로 된 걸 찾기가 더 어려운 거 있지. 그런 이유에서 자우어크라웃을 집에서 직접 담근 적도 있어. 맛은 있었는데, 집에서 정성 들여 만들어서 그런가? 뭔가 고급스러운 음식의 느낌이 나는 거야. 내 기억 속, 마트 냉장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싸구려 플라스틱 봉지, 허접해서 쿰쿰하고 짭조름한 국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던 그 봉지를 꾹 눌러서 내용물을 짜내고, 봉지 안에 남아있는 것은 물을 조금 부어 흔들어서 마지막 양배추 한 올까지 넣고 끓였던 그 찌개가 아닌 거야. 그러다가 폴란드 상점에서 폴란드식 자우어크라웃을 발견했는데 봉지 비주얼부터 내 기억 속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했어. 그래서 그걸 사다가 찌개를 끓였더니 그제야 그때 그 맛이 나더라. 어느새 내 소울푸드 김치찌개의 대용이었던 자우어크라웃 찌개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소울푸드가 되었어. 그건 이제 그저 대체품이 아니라, 그걸 대체품 삼아 지냈던 내 7년간의 소울을 나눠가진 존재인 거지. 


홍콩에 사는 지금, 맛있는 자우어크라웃 찾기는 더더욱 힘들지만 종종 그때 그 맛이 나는 제품이 들어오기도 해. 그렇게 우연히 만나면 이제 꼭 두 봉지를 사. 한 봉지로는 독일 음식을 해 먹고, 다른 한 봉지로는 자우어크라웃 찌개를 해 먹어. 며칠 전에도 마트에 갔다가 그걸 보는데 두근두근하면서 반갑더라. 내가 독일에 남겨놓고 온 내 소울 한 조각을 보는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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