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한 페이지에 며칠의 공백이 담담하게 놓여 있다.
그 빈 공간을 마주할 때면 종종 두렵다. 무엇을 하며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들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되지 않은 그 나날들에, 나는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며칠 전 일기에는 하루 종일 아픈 엄마를 돌봤던 이야기를 썼다. 마지막 줄에는 오늘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을 내일 소상히 적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면 아마 나는 피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다. 기록은 없고 그저 얄팍한 기억만 있을 뿐이니.
시간은 흐르고 나는 살아간다. 낮을 보내고 밤을 지새우고, 햇볕을 가리다 달빛을 맞는다. 그런데 과연 내가 시간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시간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고, 나는 그저 그 흐름 속에 떠밀려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시간을 조절한다고 믿는다.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관리하며 시간을 활용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시곗바늘의 움직임, 달력의 숫자, 몸의 변화 같은 흔적들뿐이다. 시간 그 자체는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다. 자유의지로 살아간다고 자부하지만, 시간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시간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시간은 일방향으로만 흐른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미리 체험할 수도 없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방황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결국 시간은 고통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지금'이라 부르는 순간은 닿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고, 미래는 끝내 오지 않을 듯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삶이란, 손끝에 스칠 듯 말 듯한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영원히 미끄러지는 과정 아닐까?
그럼에도 가끔은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들이 있다. 주로 어린 시절에 그랬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때때로 경험한다. 그런 순간들은 대개 사랑과 관련이 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시간을 잊는다. 정확히는, 시간이 우리를 잊어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 달콤한 속도에는 대가가 따른다. 사랑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시간은 더욱 빠르게 달려간다. 마치 잠시 멈춰 섰던 만큼의 빚을 갚으려는 듯. 그렇게 우리는 급하게 어른이 되고, 바쁘게 살아가다 어느새 늙어버린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다른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환상을 붙잡고 산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에 완전히 지배당하면서도 자유롭다고 믿는 것, 무력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 설령 그 믿음이 착각이라 해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일기장의 빈 페이지를 다시 본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들이 두렵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 공백 자체가 하나의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는 것과 기록하는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야말로 시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