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의미란

by 유랑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왔다. 살아왔다는 건 무수한 선택의 길을 걸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걸어온 길에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정표가 있는 길을 걸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어린 날엔 모두가 그랬다. 다만 길이 넉넉치 않았다. 그럼에도 길은 이어졌다.


깔대기처럼 갈수록 좁아지는 길에서 헤맸다. 좁았기에 길을 벗어나긴 어려웠지만, 왠지모를 불안에 시달렸다. 다행히 계단이 있었고, 손잡이와 로프가 있었다. 미끄러지면 다시 붙잡을 수 있는 안전장치들이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착각했다. 나아가고 있다고. 결국 어딘가 도착하게 되리라고.


그 길이 끝난 지점, 넓은 들판이 펼쳐졌을 때의 당혹감을 기억한다. 길은 거기까지만 나 있었다. 앞은 허허벌판이고, 돌아봤을 때 좁은 길목은 아득히 사라져 있었다. 어디로든 가야만 살아남는 상황. 누가 방향을 정해주지도 않았다.


지금껏 삶에는 이정표가 있었다. 따라가기만 하면, 적절한 때에 보상이 주어졌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했다. 그 길 위엔 보상은커녕, 좌절만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황야에서 나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혹여 무언가를 찾아도 붙잡을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깊은 의미를 담았던 것들도, 터부시했던 것들도 함께. 커다란 바위도, 주먹만 한 돌멩이도 언젠가는 모래가 된다. 모래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이는 없다. 그 모래 자신도 마찬가지다. 바람에 휩쓸리며 흩어지는 것, 모래는 그뿐이다. 그 속에서 모래는, 어쩌면 자신이 열반의 경지에 올랐다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가. 애초에 ‘의미’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언가를 달성하고, 즐거워하고, 인정 받고, 또다시 좌절하고 인내하고, 다시 달성하는 반복. 그런게 의미일까. 대학 시절 교수님이 얘기했던 ‘나선형 진보’란 개념이 떠오른다. 정반합의 구조로 삶을 설명하는 방식. 그 자체가 의미일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긴 하겠다.


하지만 그건 구조론적 해석일 뿐이다. 전진과 후퇴의 반복 속에서 진보를 피워내는 삶 또는 세계. 그런 이론적 접근보다 나는 ‘왜’에 더 끌린다. 그런데 내 부족한 식견으로 그 ‘왜’를 파고들면 모호한 답밖에 없고, 결국 자괴감만 깊어진다.


‘의미’란 시대마다 변해왔지만 분명 사회 구성원들이 갈망하는 공동의 목표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열망 외엔 공동체의 사명이나 소명 같은 건 사라졌다.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외향적이고 논리적인 인간 외엔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기 어려운 시대다. 아니, 어쩌면 나처럼 ‘정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소수일까?


모든 인간은 각자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그 의미는 편의에 따라 수없이 수정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자주 바꾼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삶의 의미 즉, 무엇에 가장 큰 힘을 쏟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백년도 겨우 사는 인간은 이것저것 간을 보고 흉내내다 결국 타인의 길을 따른다. 그리고는 자기 의지로 그 길을 걸은 듯 자랑스러워한다. 대개는 부, 명예, 가정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가장 인위적임과 동시에 가장 진부하다. 그것들은 모두 설계된 것이며, 통제된 환경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느낀다. 원동력 삼아 살아간다.


그러나 의미는 없다. 의미란 지속될 때, 영원할 때만 가치가 있다. 잊히는 건 가치가 낮거나 없다. 우리가 품고 사는 의미는 결국 사라질 뇌 속의 전기 신호일 뿐이다. 모든 것은 옅어지다 증발한다.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의 것이라면 더욱 빠르게. 정반합이니 뭐니 하는 개념이나 이론들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습성에서 비롯한 것이며 심하게 말하면 발악의 일종이다.


‘소소한 행복’이라는 말이 오래 쓰였다. 그런데 그 말은 어쩐지 초라하다. 소소한 행복은, 무력하고 늘어진 삶의 반작용으로 생긴 말이다. 아주 평화로운 사회에서조차 우리는 불만족을 느끼고, 그래서 ‘소소함’에 의미를 두려 한다. 그게 의미일까?


죽음으로 끝나는 여정에서, 살아 있는 것들에게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다는 괴로움을 타고났기에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사실 의미란 없다. 그래서 쟁취할 수도 없다.


모든 신념과 사상, 존재들은 단지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의 이정표가 되지 못한다. 그럴듯한 이정표를 따라 달려왔지만, 끝에 마주한 건 고난의 사막길뿐이었다. 간혹 오아시스를 보긴 했지만 그것을 의미라 부르기엔 초라했고, 심지어 몇 번은 신기루였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들이었다.


의미란 욕망을 포장한 말이다. 모든 욕망은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결국 의미는 이기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의미란 얼마나 하찮고 부끄러운가. 그럼에도 왜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애써야만 하는가. 의미를 좇는 이들을 우리는 왜 동경하는가. 그렇지 않은 이들은 도태되어야만 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 때면, 차라리 의미를 찾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또 하나의 의미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의미를 거부하는 것 또한 의미의 한 형태라면, 우리는 결국 의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생각과 글이야말로 어쩌면 제일 무의미한 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