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지점을 향해 견디고 돌아서니 그 바람이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매일 아침 한강을 걷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겨울에 걷기 시작했다.
운동도 너무 싫어하고 추운 것도 너무 싫어하는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잦은 한파가 몰아치는 2021년 겨울에 한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이유는 '걷다 보면...'의 기대 때문이었다.
'걷다 보면 복잡한 머리가 좀 정리되겠지.
걷다 보면 가슴 답답한 현실이 좀 잊히겠지.
걷다 보면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위로받겠지.'
인생은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았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와주지 않았고, 하나님은 내가 원한다고 다 들어주시지는 않았다. 될 듯하다가도 결국 어그러지고, '될 거야' 하는 기대감은 나를 깊은 절망과 좌절 속에 몰아넣었다.
그 누구도 내가 아니었고, 그 누구도 온전한 나의 고민을 알 수도 해결해 줄 수도 없었다.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잘 살아왔고 누구보다 행복했고 누구보다 자존감 높게 살아왔는데...
지나간 것이 현재를 위로하거나 대신해 주지는 않았다. 지나간 것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인생의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잘 보냈으니, 요즘 취업이나 미래의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진심으로 도움이 된다면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이제, 젊음으로 겁 없이 부딪히는 20대도 보냈고 가장 에너지 넘치게 일하는 30대도 보냈고 한 회사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인생의 중간 목표에 도달하는 40대도 보내고 나니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 50대의 시작점에 서서 두려운 미래와 마주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이지만, 또한 새로운 도움이 필요한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밤에 잠이 잘 안 오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함께 사회생활하던 동료들은 내가 미국에 있는 사이에 더욱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다들 임원으로 한 자리씩 하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있는 것 같아 너무 좌절감이 느껴졌다. 나만의 비즈니스를 준비하려다 보니 남들은 도전적으로 자신감 있게 척척 잘하는 거 같은데 나만 겁나고 걱정이 가득한 것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이런저런 고민과 걱정과 좌절감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걸었다. 매일 아침 목표지점까지 만보 정도를 걸었다.
햇볕이 따뜻한 날은 걷다 보면 기분이 좋아졌고 구름이 가득한 날은 걷다 보면 더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걸었다.
영하 8도쯤 되는 날,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다시 들어갈까 고민했다. 집 앞에서부터 칼바람이 불었는데 한강변에 도착하니 바람의 강도는 더했다. 그냥 돌아갈까 또 고민했다.
다시 걸었다. 칼바람이 나의 몸의 전진을 막을 만큼 강했다. 다른 날보다 걷기가 훨씬 힘들었다. 같이 걷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허벅지가 꽁꽁 얼어붙어 에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오기가 생겨 매일 가던 목표지점까지 도착하여 바로 몸을 돌려 되돌아오는 순간의 전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 온몸을 내리치던 칼바람이 내 등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아까는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햇빛이 얼굴로 비쳤고 칼바람은 내 등에서 그리 차지 않은 느낌으로 내가 걷기 쉽게 밀어주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잦아든 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바람 속에 서 있었는데 그 느낌은 너무 달랐다. 나를 방해하던 차가운 바람이 나의 걸음을 도와주는 바람이 되었다.
칼바람이 가져다준 용기였다.
지금의 나의 방황과 좌절과 어려운 상황이 힘들다고 목표를 놓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차가운 칼바람에 불과하겠지만, 그것들을 짊어지고 목표지점을 향해 힘겹게 걸어 들어가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그 경험들이 나만의 노하우와 자산이 되어 내 등을 힘차게 밀어줄 것이다. 그 시간들은 분명 내가 모르는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시간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