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은 “만약 하느님이 창조하신 영혼들로부터 죄악이 나오고 영혼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일진대, 어째서 죄악들이 하느님께로 소급되지 않느냐는”(77) 근본적인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제1권의 서론에 제시된 이 의문은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겪었던 사상적 방황의 원인으로 고백 되는 동시에, 이 책의 주요 골자가 된다. 따라서, 악과 자유의지, 그리고 이 두개의 개념이 인간과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주목하면서 <자유의지론>을 바라봐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악의 본질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일차적으로 “자기가 당하기 싫어하는 바를 행하지는 않는”(83), 일종의 황금률을 위배하는 것들을 악으로 정의하려고 하지만, 상호합의에 의한 간통과 같은 사례를 근거로 이를 반박한다. 이어서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들을 악으로 규정하려고 하지만, 법률을 위반하는 선한 행동들을 반례로 제시하여 이마저도 비판한다. 이를 통해 그는 “밖에서 기왕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 자체”(85)보다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핵심에서 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장한 악의 핵심은 ‘욕망’이다. 그러나, 모든 욕망이 악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는 욕망을 더 세분화하여 분류한다. 그는 악이 유래하는 욕망을 무질서한 욕망(정욕)이라고 칭하며, “누구든지 자기 의사에 반해서 상실할 수 있는 그러한 사물들에 대한 사랑”(89)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는 정당방위에 대한 살인도 악한 행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정당방위에 의한 것이어도 생명이나 자유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서 상실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당방위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 법률과의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한 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로 질문의 방향을 옮겨가게 된다. 그는 여기서 현세적 법률(실정법)과 영원법을 나누게 되고, 현세적 법은 영원법을 근거로 해야만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가 규정한 영원법은 “모든 사물이 질서정연해지는”(101) 그러한 법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인간은 질서정연한 인간이다. 따라서, ‘올바른 인간’을 밝히기 위해서는 ‘질서정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선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동물과 인간을 대비하면서 무엇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지 살펴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인간과 가축을 구분하는 것은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것’의 유무였다. 그렇기에 더 탁월하게 산다는 것은 더 잘 인식하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이성을 더 잘 발휘하면서 산다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질서정연한 인간이란, 이성이 “인간을 구성하는 여타의 것들을 지배하고 통치”(107)하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질서정연한 삶과 멀어진 것은 어디에 책임이 있는 것일까.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악을 배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배우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선에 해당되기 때문에 ‘가르치는 행위’는 선으로 이끄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배움’의 대상이 아니고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인 하느님은 불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지성의 지배를 강제로 박탈할 수 없다. 인간보다 하위의 존재는 열등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지성의 지배권을 인간으로부터 강제로 박탈할 수 없다. 결국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우리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 ‘자유의지’에 의해 지성의 지배권을 정욕으로 넘겨준다는 것이다.
악의 원인을 밝혀 내었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의문이 있는데,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하였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의문은 <자유의지론>이 출발한 바로 그 의문(77)과도 연결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다시금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으려 노력한다. 우선, 그는 모든 존재가 선이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밝힌다. 피타고라스 학파를 연상하듯이, 그는 존재의 형상에서 수(數)를 발견할 수 있고, 이 때문에 형상이 허무로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영원하지 않는, 사라지는 존재들 또한 기저에 영원한 수라는 형이상학적인 존재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존재근거는 스스로 부여하지 못하고 상위의 존재, 즉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형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고,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선하다. 자유의지 또한 선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 없이는 아무도 올바르게 살지 못할 터”(255)이기 때문이다.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위계가 존재하듯이 ‘선함’도 여러 위계가 존재한다. ‘정의’와 같은 선은 악용하지 못하므로 위대한 선에 해당된다. 그에 반해, ‘자유의지’는 악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선, 상대적 선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인해 올바른 선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변적인 선이나 하위의 선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유의지로 인해 악이 발생하는 것은 “공통되고 불변하는 선에 등을 돌려 배향”하고 “외적인 선이나 열등한 선에로 전향”(263)하는 데에 있다. 즉, 의지 자체에는 선임이 틀림없지만, 그 의지가 향하는 곳에 따라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의지가 올바르지 못한 선으로 향하는 그 운동 자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한계점이 드러난다. 그는 ‘허무인 것은 알 수 없다’(263)며 이 의지의 운동성에 대해서는 답변을 이어가지 않는다. 그저 “적어도 하느님께는 속하지 않으리라”(265)라며 신앙의 굳건함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수립하는 데에 있어서, 이성으로 신앙을 밝히려는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성으로 밝히기 힘든 부분에 도달하자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성을 드러낸다.
그의 논변을 따라가보면 또 다른 비판점을 마주하게 된다. 악이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존재의 위계를 나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을 가르치는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악으로 인도할 수 없다. 인간과 동등한 존재가 악을 가르친다면 인간보다 하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고, 하위의 존재는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속에서는 반례로 비춰질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 태초의 지혜, 가장 드높은 지혜를 지닌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변한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최초의 악을 행한다. 비록 선악과를 딴 행위는 본인들의 의지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도덕적으로 하위의 존재라고 볼 수 있는 뱀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고 이는 하위의 존재에게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와 어긋난다.
더 나아가, 악의 기원을 인간의 자유의지로만 돌리는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면이 있다. 일차적으로, ‘자유의지’에 대해 여러 다른 맥락을 가진 정의가 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자유의지'라는 거대한 개념 자체가 가지는 모호성은 명확한 사고의 전개를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자유의지’에 대한 적확한 정의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선택이 순수한 ‘자유의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우리의 선택은 환경적, 사회적 그리고 생물학적 요인 등과 같이 복합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자유의지의 정의에 따라서 영향받는 범위의 크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악과 자유의지가 일대일대응 되도록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다소 기계적이고 이상화된 인간관에 머물게 만든다.
(성염 선생님의 번역본을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