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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기자 Sep 15. 2017

재벌 개혁, 시대의 요구인데…‘가족승계’ 욕망 여전

이재용 부회장 1심 이후 재벌

“국내외 투자은행(IB)들이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주를 열심히 보고 있다.”

  기업경영성과 평가기관인 시이오(CEO)스코어 박주근 대표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이후 투자업계가 국내 재벌 뿐만 아니라 중견기업 계열사들의 지분 관계를 유심히 보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은 투자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재벌의 ‘약한 고리’가 어디인지 알려줬다. 헤지펀드 엘리엇은 삼성의 합병 발표 전부터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유심히 들여다봤었다. 박주근 대표는 “재벌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이전처럼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뒀고, 개방된 자본시장에서 무리수는 이들의 취약한 고리가 됐다”고 했다.


  지난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약한 고리’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시키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다. 삼성 총수일가 가운데 재판을 받아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촛불 시민들이 적폐 청산을 요구하러 나서면서 적폐의 근원에 정경유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이재용 부회장이 실형을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2017년은 재벌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분위기가 모두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해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로 바뀐 뒤 입성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학자일 때부터 소문난 재벌 개혁론자였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뒤 재벌에 직접 메스를 들이대기 전에 올해말까지 스스로 개혁에 나서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재벌은 이처럼 높아진 변화의 요구와 이재용 부회장의 실형 선고라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직 재벌가에선 특별한 변화의 모습은 없다. 삼성그룹은 1심 실형 선고 뒤에도 이재용 부회장의 ‘옥중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재벌 역시 대기업집단 내부거래 전수조사를 한 공정위의 추이를 지켜보는 등 정부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재벌그룹에서 오래 일한 한 팀장은 “재벌이 그동안 경제성장에 기여한 게 있는데 무조건 재벌을 ‘적폐’로 보는 현 상황도 정상적이진 않다”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한국 재벌은 그동안 공고했다. 재벌은 1950∼60년대 창업주 세대와 1990∼2000년대 2세대를 거쳐, 3세대 또는 4세대로 내려왔다. 경영학자들은 보통 세대가 내려갈수록 상속세를 내거나 지분이 분산돼 가족경영기업이 줄어든다고 보지만, 한국은 딴판이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자료를 보면, 전체 상장기업 가운데 가족경영의 비율은 영국이 10% 미국이 30% 유럽이 70% 수준인 반면, 국내 상장기업은 약 95%가 가족경영기업으로 분류된다. 


  국내 재벌이 가족 승계를 하는 이유는 두가지로 꼽힌다. 지분이 적더라도 복잡한 순환출자 등을 통해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총수일가는 이대로 승계하는게 이익이다. 또 승계 구도에서 떨어져 나간 총수 일가에게 작은 회사라도 만들어 일감을 챙겨주려면 대기업집단을 유지하는게 유리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무리수를 둘 위험이 있는 대표적인 곳은 한화, 한진, 현대중공업 등이다”고 말한다.


  재벌들은 이재용 부회장 재판과 다른 ‘신호’도 받고 있다. 한화그룹은 지난 12일 계열사 한화에스앤씨(S&C)의 지분 헐값매각 의혹과 관련해 김승연 회장을 상대로 한 주주대표소송을 대법원에서 무죄를 얻어냈다. 김승연 회장은 ㈜한화가 보유한 한화에스앤씨 주식을 장남 김동관씨에게 헐값에 넘기게 했다는 혐의를 받은 바 있다. 이후 김 회장의 아들들이 지배하는 한화에스앤씨는 그룹 일감몰아주기를 통해 성장했고, 가족 승계의 핵심 고리로 주목받고 있다. 



  앞서 지난 1일 한진그룹도 서울고법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제재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에서 승리했다. 법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자녀들이 100% 지분을 가진 싸이버스카이가 일감몰아주기를 통해 대한항공으로부터 얻은 이익의 규모가 매출액과 순이익에 견줘 적다고 판단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재벌개혁이 사법부에서 잇따라 제동이 걸린 셈이다. 


  경제개혁연대는 13일 “한화에스앤씨 사례는 법인이 보유한 핵심 자회사의 지분을 총수일가의 자녀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예전 삼성에버랜드 사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며 “법원의 형식적 판단이 재벌의 편법 승계를 사실상 용인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재벌들은 이전에도 ‘소나기’는 피해가는 식의 행태를 보인 바 있다. 경제개혁연대가 올해초 재벌들이 과거에 불법 행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뒤 내놓은 지배구조 개선안 등을 분석한 결과, 불법행위의 당사자인 총수일가가 단기간 내 경영에 복귀한 사례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실제로는 바뀐게 없다는 이야기다.   



  재벌들이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재벌 개혁’을 미루지 말아야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지금이 근본적인 재벌 개혁을 할 수 있는 때”라고 말한다. 박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 개혁이 나왔지만 실패한 이유로 재벌 등 경제 권력이 너무 강력했던 것을 들면서,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이러한 지형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민의 힘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지금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며 “재벌 개혁을 하지 않으면 재벌의 누적된 부실로 인해 경제위기가 올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장도 재벌 중심의 경제가 되면서 경영능력이 모자란 기업들이 퇴출되지 않는 등 생태계가 건강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그는 “수많은 경쟁에 노출된 외국 시장에선 기업이 피붙이한테만 경영권을 승계하면 회사가 금방 파탄이 나고 주주들이 당장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견뎌낼 수 없다”며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장세진 카이스트 교수(경영대학원)는 재벌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 장세진 교수는 “대주주 일가가 생각을 바꾸면, 스웨덴 발렌베리나 인도 타타처럼 주식을 신탁한 공익법인 등을 통해 기업을 소유하면서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초콜릿과 애완동물 사료를 만드는 세계 최대 식품기업 가운데 하나인 마즈(MARS)도 1911년 창업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면서 이를 실현하고 있다. 마즈는 가족 소유기업으로 운영되면서 연간 매출액이 약 350억 달러 규모까지 성장했다. 김종복 한국마즈 상무는 “4대째인 창업자 후손들은 이사회를 구성해 인수합병 등을 결정하고, 주로 전세계를 누비며 직원들에게 회사의 비전과 철학을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영은 회사 내부 승계 프로그램을 거쳐 올라온 전문경영인이 최고경영자가 돼 맡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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