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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기자 Mar 13. 2016

재벌 4세… 활기 잃은 한국 경제

두산 박용만 회장 퇴진… '사우디식 형제 경영' 따라 박정원 회장 등판

두산의 4세 경영 시작은 한국 경제가 혁신의 동력을 잃어가는 한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3월8일 서울 여의도에서는 '부실기업 실태와 구조조정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 토론자는 한국 경제가 어려운 사례 가운데 하나로 두산을 꼽았다. 두산그룹은 최근 박용만 회장이 물러나고 창업주의 4세대인 박정원 회장 체제가 시작됐다. 그 토론자는 "두산에서 4세 경영이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미래 성장 산업 이야기를 하는데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아들에게 물려주면 기업이 3년을 가겠습니까. 4대째를 가는게 당연하듯이 하지 않습니까"라고 한탄을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최근 한화투자증권 대표를 지내고 더불어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긴 주진형 전 사장의 이야기도 재벌을 향했다. 삼성과 한화 등 재벌그룹에서 일했고, 금융권에 있으면서 재벌의 사업을 관찰한 이다. 

"선제적 구조조정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구조조정이 어려운 이유로 거론되지 않은게 재벌의 지나치게 방만한 사업구조다. 재벌 총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신이 회사를 관리하는데 가신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있을) 자리이다. 가신이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서 얻는 게 없다(회사가 없어지면 자리가 사라진다). 동양 그룹의 사례가 그렇다. 동양그룹이 저 상황이 될 때까지 현재윤 회장한테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현금이 모자를 때가 되어서야 보고가 들어갔다. (구조조정 등)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지배구조도 큰 역할을 한다"


두산은 한때 구조조정의 전도사였다. 전통적인 소비재 기업에서 선제적으로 중공업으로 주력 업종을 바꾼 구조조정은 성공적인 구조조정 사례였다. 그런데 옮겨간 업종에서 중국 불경기 등으로 인해 두산인프라코어 등 실적이 반토막났다. 최근엔 두산이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런 와중에 4세 경영 체제로 전환을 단행한 두산, 괜찮은 걸까. 




재계 순위 17위(2015년 자산 기준) 두산그룹의 박용만(62·사진 왼쪽) 회장이 회장직을 내놨다. 박용만 회장은 지난 3월2일 조카인 박정원(54·사진 오른쪽)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넘겨준다고 밝혔다. 박정원 회장은 박용만 회장의 큰형인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아들로 총수 일가 4세 경영인이다. 한국 재벌에 첫 4세 경영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박용만 회장은 3월2일 열린 두산 이사회에서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히며 “오래전부터 그룹 회장직 승계를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그룹 회장직에서는 물러나지만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그대로 유지한다.


두산그룹은 박두병 초대회장의 뜻에 따라 3세부터 형제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는 이른바 ‘형제 경영’을 해왔다. 3세대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은 1981~91년과 1993~96년에 회장직을 맡고 동생에게 물려줬다. 차남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은 1997~2004년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2005년 3남인 박용성 회장이 추대되고 고 박용오 회장이 물러나자 형제간 갈등이 불거졌다.


가부장적 승계 방식 고착화


고 박용오 회장은 회장직에서 밀려나자 박용곤·박용만 회장의 비자금 의혹 등 비리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해 두산그룹 비자금 수사가 시작된 바 있다. 나머지 형제들은 박용오 회장을 가문에서 쫓아냈다. 이후 3세들은 3~4년씩 회장직을 번갈아 맡았다. 4남 박용현 회장은 서울대병원 의사를 그만두고 가족 경영으로 돌아와, 2009~2012년 그룹 회장을 했다. 5남 박용만 회장은 2012년 그룹 회장을 맡아 4년째 경영하는 중이었다.


이런 경영 방식에 대해 2005년 박용성 회장은 “사우디 왕가식”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한 세대 형제들이 차례로 대표를 맡은 뒤 다음 세대 장자로 넘어가는 방식이란 것이다. 박용성 회장은 당시 자신의 회장 승계에 대해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 그룹 회장직은 집안 대표이자 대주주의 대표로 보면 된다”고 했다. 형제 경영이 가능한 것은 두산 총수 일가의 형제 경영진이 두산그룹의 지주회사인 두산의 지분을 0.01~6.29% 나눠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총수 일가가 뭉쳐야 40% 이상의 지분으로 두산을 지배할 수 있다.


재벌 총수 일가 4세대인 박정원 새 그룹 회장의 등장은 한국 재벌 체제의 가부장적 승계 방식이 고착화됐음을 의미한다. 상장회사의 경영권이지만 가족회의를 통해 승계가 결정되며, 가문의 남성 위주로 차례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삼성그룹도 이건희 회장 뒤를 이어 딸 이부진·이서현씨를 제치고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로 그룹 경영권 승계가 확실시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오래전부터 아들 정의선 회장이 경영권 승계 준비를 하고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 생각지도 않는다”


4세 경영의 등장에 대해 시장의 반응은 조용하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증권사 연구원은 “4세로 넘어가는 게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한국 재벌에서 총수 일가의 계승은 이제 당연해졌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설 것이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회장 교체가 알려진 뒤 3월3일 두산그룹의 지주회사인 두산의 주가(8만3800원)는 전날보다 3.08% 올랐다. 그러나 3월2일 함께 발표된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작기계 부문 매각과 두산건설의 공장 매각 방침 등 계열사의 재무 부담을 덜었기 때문에 주가가 올랐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경영권 교체에 대한 시장의 기대도 별로 없고 변화의 바람도 불지 않는 상황은 위험하다. 외국의 경우 기업 최고경영자가 바뀌면 일반적으로 새로운 경영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오른다. 그만큼 재벌 4세 경영의 시작은 한국 경제의 활기가 떨어진 자화상인지 모른다.


특히 두산그룹은 최근 힘겨운 시기를 넘기는 중이다. 굴착기 등을 만드는 핵심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의 실적이 중국의 불경기로 곤두박질쳤다. 경영 사정이 악화되면서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4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20대 신입사원까지 희망퇴직 대상에 올려 기업 이미지까지 추락했다. 또 다른 계열사인 두산건설 역시 부동산 불경기로 경영이 악화돼 그룹 차원에서 계속 돈을 쏟아붓고 있는 형편이다.


두산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고자 3월2일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작기계 부문을 사모펀드인 MBK에 1조1300억원을 받고 매각한다고 공개했다. 이익이 계속 나는 알짜 계열사까지 매각해야 할 정도로 다급하다.

실점 위기에서 마운드에 오른 박정원 새 그룹 회장(두산베어스 구단주)의 과제는 막중하다. 물론 두산그룹 내 경영권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두산그룹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최근 회사 내부가 실적 악화로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쇄신을 하기 위해서는 경영진 교체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박정원 회장은 박용만 회장과 다른 경영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그룹 조직의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박정원 회장, 시장이 신뢰하지 않는 이유


문제는 그의 경영 능력이다. 지난해 경제개혁연구소가 전문가 50명을 대상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재벌 총수 일가 승계자 11명에 대해 경영능력 평가를 한 보고서를 보면, 박정원 회장은 43.41점(100점 만점)을 받았다. 11명 가운데 신동빈(45.97점) 롯데그룹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점수였다.


그러나 보고서를 쓴 위평량 박사는 “개별 순위보다 이들이 50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박정원 회장은 언론에 노출이 적어서 점수가 잘 나온 측면도 있다. 재벌 경영권 승계 대상자들이 그만큼 경영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평가를 진행한 전문가 집단은 대학교수 18명, 주요 민간 연구소 전문가 12명, 펀드매니저 11명, 증권분석가 9명으로 모두 50명이었다.


박정원 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은 박 회장이 2009년부터 두산건설 회장으로 있으면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정원 회장이 그룹 회장에 지명된 날, 두산건설은 공시를 통해 자본금을 4207억원에서 511억원으로 줄이는 무상감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발행 주식 수는 그대로 유지한 채 주식 액면가를 5천원에서 500원으로 낮추는 방식이다. 감자는 보통 회사가 사업 손실 금액이 클 때 이를 메우기 위해 실시한다. 두산건설이 무상감자를 해야 할 만큼 경영 상태가 악화됐다는 이야기다.


부동산 경기 후퇴의 직격타를 맞은 두산건설은 2011년 이후 계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는 중이다. 그룹에서 두산건설을 살리기 위해 계열사를 동원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이익을 내는 알짜 사업 부문까지 다른 계열사에서 떼내어 붙여줬지만 아직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곳인 한국신용평가는 “두산건설은 2013년 (그룹의 지원으로) 유상증자를 하고 현물출자된 배열회수보일러(HSRG) 사업부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건설사업의 취약한 수익성으로 인해 영업이익 규모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높은 금융비용을 부담함에 따라 당기순손실이 4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단기자금 위주의 재무 구조로 인해 유동성 위험도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감자가 결정되자 3월3일 두산건설의 주가는 전날보다 8.81% 내린 3935원까지 떨어졌다. 두산건설에 투자한 소액주주들은 아우성을 쳤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외국 기업의 경우 감자를 할 만큼 경영 사정이 악화되면 경영진이 물러날 정도로 큰 책임을 진다”고 설명했다.


“30년간 경험 쌓았다” vs “경영 능력 검증해야”



그럼에도 박정원 회장은 그룹 회장으로 승진했다. 120년 역사를 가진 두산은 상장사 5개를 포함해 20여 개 계열사에 2만여 명의 임직원이 일한다. 또 두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 등 상장회사에는 임직원뿐만 아니라 많은 주주와 하청업체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생계가 걸려 있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 자리가 재벌가 장손이라는 순서에 따라 돌아갔다. 최소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인 4세대로 내려왔는데 경영은 전근대적 ‘사우디 왕가’식 체제가 유지된 셈이다.


두산그룹 쪽은 “박정원 회장은 사원에서부터 시작해 지난 30여 년 동안 두산그룹의 변화와 성장에 기여하면서 준비된 리더로 자리매김해왔다. 특히 2007년 (주)두산 부회장, 2012년 (주)두산 지주부문 회장을 맡으면서 두산그룹의 주요 인수·합병(M&A) 의사결정에 참여해 턴어라운드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에 핵심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국민연금(두산 지분 7% 보유)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은 왜 이 시점에서 최고경영자가 가문 내에서 승계되는지, 박정원 회장의 경영 능력은 어떤지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이 바뀔 수 없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도 없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떠나 주식시장이 흔들리는 등 경제에 악영향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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