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취향_ 향기로 기억하는 공간

by 비온뒤

여러분은 어떤 향기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공간을 떠올릴 때 그곳의 향기를 먼저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향기는 공간 전체를 채우며 그 장소의 인상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뒤,

흙과 나무가 젖어 번져가는 독특한 향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기입니다.


조금은 차갑고 청량한 그 향기는 몸도 머릿속도 맑게 바꿔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필명 '비온뒤'는 그 공기를 떠올리며 지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앞으로의 길이 비 온 뒤의 공기처럼

차갑지만 맑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몇 해 전 제주에서 한 달살이를 했을 때,

비 오는 비자림 숲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나무들과 흙이 만들어 내는 향기는

아직까지도 그 순간을 또렷하게 떠올리게 해 줍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린 날이면 그 날 찾았던 비자림 숲이 저도 모르게 떠오릅니다.

숲의 향기는 풍경보다 오래 남고, 어쩌면 기억보다도 오래 남을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숲이 아닌,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마주하는 공간들도 그곳의 '향기'로 각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는 일의 특성상 미팅이 참 많았어서 정말 많은 장소를 다녔는데,

희한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 건 '향기'입니다.


오래된 한정식집에 들어서면 조금은 쿰쿰하지만 고소한 냄새가 있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올리브유가 달궈질 때 나는 고소하면서도 새콤한 향이 있고

로스터리 카페에선 천장부터 바닥까지 원두의 향이 가득히 채워져 있습니다.

베이커리 카페에서는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버터 냄새가 조용히 공간 전체를 채우기도 하지요.


이런 향기들은 공간을 기억하게 합니다.

향기는 기억을 불러오고 누구와 함께 한 시간이었는지,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는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가끔은 그때의 감정들도 함께 따라옵니다.

일하다 힘들 때면 동료와 잠시 고민을 나누던 카페의 커피 향

바쁜 업무에 자주 혼밥하러 가던 분식집의 달콤한 떡볶이 냄새

워킹맘이면서도 초가을 야간 수업을 들을 때 코 끝에 풍겨오던 가을 공기


결국 향기는 공간 속 감정을 불러와 나를 다시 그 시절에 데려다줍니다.

저는 어떤 인테리어나 음악 보다도 향기로 공간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향기로 어떤 공간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여러분을 행복하게 했던 기억 속에 그 공간은 어떤 향기로 가득 차 있었는지

한 번쯤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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