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떠돌이 생활하기
1. 뭔가를 좋아할 권리. 그리고 나의 선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오래전, 독일어와 불어 사이에서의 고민을 떠올려본다. 전혀 접해 본 적도 없고 기본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한다는 이유로 골라야 했던 그때. 나는 그냥 불어가 느낌이 좋았고 매력 있었다. 너무나 정돈되어 있고 많은 법칙이 존재할 것 같은 독일어에 비해 불어는 어지럽게 흐드러진 언어일 것 같았다. 그 카오스적인 느낌이 불어로 끌리게 했다. 그런데 막상 선택의 순간에 나는 내 느낌을 싹 무시하고 아빠의 추천에 따라 독일어를 골랐다.
마음의 끌림 대신 누군가의 충고를 따랐던 그날의 결정을 난 두고두고 반성했다. 내 선택권을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양도하니 후회, 남의 탓, 자책 등의 불필요하고 건강하지 못한 감정이 따랐다. 무엇보다 독일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결국 이 일은 내 인생에 관련된 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끌림이고, 의사 결정의 주체는 100% 나 김수진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야 틀린 결정을 해도 분하지 않고,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으니까. 작은 실수로 일찍 배워 다행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2. 내 마음의 미스터리
그런데 마음의 끌림을 감지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내기가 또 쉬운 게 아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은 불어 or 독일어 사이에서의 고민보다 훨씬 복잡하다. 대부분은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이 아니라 백지에 답을 써내는 주관식이다. 게다가 우리는 한국인이다. 부모님 칭찬, 친구들의 부러움에 눈높이를 맞추고 심지어는 나와 관계없는 남들 시선 의식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들이는 민족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뻔한 답이 아닌, 진정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명확하게 파악하라는 건 낯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일에 맘껏 시간을 투자하며 살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진정 나를 위한 목표나 소망을 소원이라 부른다면, 내 경우, 소원 하나 알아내는데 또 이루는데 몇 년, 몇십 년이 걸리곤 했다. 달리 보면 긴 시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마음에 귀를 기울여 알아낸 30대 초반의 내 소원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3.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
30대 초반에, 9년간의 직장생활을 훌훌 그만두고 백수를 자청했다. 지금 말로 번아웃이 왔는데 일단 몇 달 푹 쉬면 뭔가 다음 것이 보일 줄 알았다. 근데 막상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자 너무 막막해졌다. 당장 딴 대로 취직할 마음은 들지 않았고 결혼하긴 아직 왠지 아깝다는 마음이 드는 와중에 엉뚱하게 한국 밖의 세상을 살아 보고 싶다는 욕망만 스멀스멀 들었다.
내가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차오르는 욕구를 느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가 되었을 때, 미국에 가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엄마한테 갔다. "엄마, 우리 미국 가서 살면 안 돼?" 당연히 그땐 안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6학년이 되자 우리 식구가 미국에서 1년 살다 올 기회가 생긴 거다. 그러나 서른한 살의 현실에 그런 부모님 카드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외 진출의 방도를 찾아내야 했다. 당시의 광고 업계는 해외 지사로 나가거나 외국으로 취업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분야였고 나는 어디서부터 돌파를 해야 해외로 나갈 길이 뚫리는지 몰라 앞이 깜깜했다.
4. 글로벌 진출
고민 끝에 MBA 유학을 통해 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난 판단했다. 10년 가까이 일한 후에 갑자기 유학길 오르는 건 뭔가 어중간하다고 느꼈지만, 직장도 없이 시간 여유가 있던 차라 원서 작성을 준비하며 에세이 쓰기에 돌입했다. 근데 이걸 쓰면 쓸수록 분명 해지는 게 있었다. 난 외국에 나가기 위해 유학을 가고 싶은 거지 딱히 유학 후 원하는 커리어가 있는 것도, 공부를 하려는 이유가 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갑갑함과 무력감으로 부터 탈출하고 싶었고,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분명한 유학의 목적의식이 없기에 에세이는 암만 쓰고 또 써도 내용이 영 헐렁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난 원하는 대학 입학에 실패했다. 1년 2개월의 셀프 안식년을 접고 나는 다시 좁고 답답한 광고 업계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렇게 컴백하여 새 회사에 출근한 지 얼마 후, 외국에 3개월짜리 임시직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홍콩의 광고 회사에서 영어를 하는 한국 광고인이 필요하단다. 지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정말 희귀한 찬스임을 알려주었다. 미국도 영국도 아닌 홍콩이라는 게 망설여졌고, 처음엔 심지어 거절까지 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이 기회를 붙들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그 오퍼를 받아들였다. 결국 난 슈트케이스 두 개를 들고 홍콩행 편도 비행기를 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홍콩을 필두로 싱가포르를 거쳐 네덜란드까지 오면서 내가 원하던 커리어를 경험했고 글로벌한 삶을 누렸다. 꿈에 그리던 삶이 어찌 보면 3개월 홍콩 계약직이라는 허름한 모습으로 내게 찾아왔던 것이다. 물론 총 6개월의 임시직 기간, 좁은 호텔방에서 거의 잠도 못 자고 친구도 없이 미친 듯이 일만 할 땐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난 그 시험 기간을 버텨냈고 홍콩은 내게 참 많은 것을 준 고마운 도시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중요한 모멘트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숨 푹푹 쉬며 안 써지는 에세이를 부여잡고 유학만이 한국 탈출의 길이라고 믿었던 2003년 초, 유학의 좌절로 해외진출의 꿈을 일단 접은 그해 겨울, 홍콩행 비행기를 탄 2004년 가을, 그리고 홍콩에서 정식 직원으로서의 계약서를 받은 2005년의 봄. 그 봄에 난 심지어 결혼까지 했다. 이렇게 소원은 때로는 허름한 차림으로 비틀비틀 찾아와 나에게 도박 같은 선택을 종용하고, 내가 어떤 믿음과 신념을 보여 준 후에야 내게 그 실체를 보인다는 걸 이때 알았다. 그때 그 젊은 날, 딱히 근거도 없는 막무가내 해외 진출의 욕구에 귀 기울이고 그를 달성해 내려 노력하고, 또 대담한 선택도 마지않았던 서른 초반의 나 자신에게 지금도 난 무척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