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나

안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이기에

by 워너비 아티스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했을까.


이 주제를 이리 철학적으로 볼 생각은 아니었다. 최근 a.i. 시대 관련한 토론들 중 내가 뭘 좋아하는 지를 아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논의가 많은데, 여기저기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들 기준대로 뱅뱅 도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나를 좀 챙기려 할 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조차 몰라서 회한과 후회로 우울해지는 일이 꽤 많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하여 이 주제를 갖고 며칠 째 생각이 많다.


정년 퇴직한 분이 평생을 취미 하나 없이 일만 한 연유로 도대체 무슨 소일을 하며 앞으로의 여생을 살아야 할지 몰라 상담을 받으러 오신 이야기를 들었는데, 상담 선생님이 그분에게 뭐 하나 관심거리를 찾아 드리려 이리저리 질문을 해봐도 집과 회사 이외의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삶이 모범답안인양 사신 분이라 도대체 찾아 드리기 어려웠다는 부분. 겨우 동네 테니스장 이야기가 나와 그리로 조심히 추천해 드렸더니, 이걸 하루에 세 번씩 마치 회사 일처럼 하셔서 두 달 만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다시 오셨다는 결과까지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영감을 우리는 어떻게 얻는 걸까. 어릴 때의 교육, 주변에서의 칭찬과 기대,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의 모습,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모범'적인 사례 등, 많은 자극들이 우리의 행동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빚어갈 것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따뜻한 관심은?


나는 나를 얼마큼 알고 있을까? 사람들한테 그들 자신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빠르고 정확히 대답을 듣는 경우는 음식 선호에 대한 질문을 할 때이다. 그게 찍먹 부먹에 대한 논의이건, 제일 좋아하는 과일, 또는 우리 동네 제일 맛있는 중국집 같은 소재는 대부분 1초도 안되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분명하게 대답들을 한다.


그건 왜일까? 내가 평생에 걸쳐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지금도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먹어보고, 유행하는 레스토랑도 가보면서 나의 기호를 알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창작활동이 제일 본인 성향에 맞는지를 묻는다면? 또는 사회생활 시작한 이후, 새로운 친구나 지인을 사귀기 위해서 어떤 접근을 주로 해왔는지를 질문한다면? 새로운 걸 배울 때 나에게 맞는 학습 스타일이 뭐냐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내가 나를 알아간다는 의미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내가 나를 궁금해하고 파악하는 것, 거기서 알아낸 바를 참고하여 내 생활과 여가를 설계하는 것은 본인에 대한 최소한의 친절이고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중요한 주변인 - 직장 상사, 배우자, 시부모님, 자식들 - 에 대해서는 촘촘히 관찰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고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듯 정성을 들이자는 이야기이다.


이건 '이기적'으로 살자는 말만도 아니다. 성인으로서 내 한 몸 잘 건사하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나로 인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고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삶을 영위하려면 신체적 건강이나 경제력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잘 놀 줄(?) 아는 정서적, 감정적 독립심도 길러야 한다.


그 능력을 가지려면 미리미리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내 입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을 알듯이, 내 성정이 어떤 사람인지, 무얼 보거나 만들 때 마음이 즐거운지,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만들어 내는지, 나의 기분의 들쭉날쭉함은 어찌 잠잠하게 할지 등 말이다. 그래야 삶이 윤택하고 즐겁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삶의 여러 영역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해보고, 이에 반응하는 '나'에 대한 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짬짬이 불편한 새로운 시도 해보기.


이것은 아마도 평생의 프로젝트가 아닐지 싶다. 나라는 사람은 시간에 따라 나이에 따라 변하는 객체이기도 하니까. 다행히 디지털 이전의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나 같은 사람은, 독서와 일기 쓰기를 습관화 하여 그걸 자기 발견이라는 목적을 위해 쓸 줄 아는 천운의 기술이 있다. 이는 아주 효과적인 툴이다.


나의 취향 자체가 알고리즘에 지배당하는 지금, 나의 본질적 성향과 선호도를 지켜내지 않으면 나의 내면 세계를 보호하지 못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별 감흥 없이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 스크롤하는 시간을 줄이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습관을 들이면 어떨까.


내가 최근에 했던 새로운 시도의 예시이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고 (도자기), 예전에 시작했는데 흐지부지해진 활동을 재개하거나 (글쓰기), 어렵지만 어쨌건 유용한 뭔가를 배우고 (코딩), 또 좋은 줄 아는데 게으름 피우느라 못하고 있는 것들을 로봇처럼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겨울의 정원 관리 + 더치 공부). 이 중, 코딩은 완전 초급 단계도 내겐 어려워 얼마 못 했고, 더치 공부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체면때문이라도 안 할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도자기는 정말 좋아하게 되었고, 겨울 정원관리는 하고 나면 매우 기분이 상쾌해짐을 알게 되어 전보다 훨씬 기꺼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해야 할 새로운 시도들의 리스트도 물론 늘 만들고 있다.


사람의 루틴만큼 편하고 중독성 있는 건 없다. 하던 것만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걸 하려면 그 저항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새롭고 불편한 것들을 많이 해 보는 게, 더 젊게,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거라 생각한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행동을 해야 한다. 액션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


내가 나를 모를 때 남들만 쳐다보게 된다


나를 대상으로 한 셀프 실험을 지속적으로 해야 우리 자신의 코어에 있는 열망과 꿈이 뭔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남들의 시선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이 불특정 다수인 '남'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해외에서 산지 오래된 나는 남의 시선을 비교적 잘 무시하고 사는 편이지만서도, 한국에서 얼마간 휴가를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국적인 '비교우위'적 사고에 빠지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허상을 나도 모르게 쫓게 되는 거다.


남들의 눈으로부터 해방돼서 사다는 건 - 나도 아직 학습 중이지만 - 내 삶에서 쓸데없는 고민과 스트레스 그리고 지출까지 줄어드는 삶의 방향전환이다. 속된 말로 '남들 하는 거 다 해보고 살고 싶다'라고 하는데, 잘못하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하나도 못해 볼 수도 있다. 남들의 삶은 그것 그대로 축하해 주고 나는 나의 선택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불편함은 또한 설레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그 말 '너 자신을 알라'를 찾아보니, 해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너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라는 뜻도 있고, 네 진정한 스피릿을 알아야 한다는 설도 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이 얼마나 긴지 읽다 말았다. 단순하지 않은 주제임에 분명하다.


2025년이 코앞에 있다. 나는 여전히 네덜란드에서 정원을 가꾸어 꽃을 키우며 꽃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즐거움에 대한 영감을 나눠주고 싶다. 더 잘해보기 위해서, 또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체험 프로그램, 콜라보 등 안해 본 시도들도 하려 한다. 이렇게 글을 꾸준히 쓰고 사진도 열심히 찍어서 이를 가지고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 모든 새로운 것들에 대한 생각은, 왠지 내장이 꼬일 듯한 불편함 또는 설레임을 동반한다. 어쩜 둘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해보지 않은 것들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나를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내가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해 나갈지, 잘 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해봐야 하는 거다. 사실 지금 좋아하는, 그래서 나름 잘 하는 모든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의 우연과 필연, 그리고 시행착오로 찾아졌다.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이다.

늘 그렇듯, 날 향해 되뇌이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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