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 올렸던 글인데, 아까워서 여기다가 다시 올려둡니다.
추천 기준
1. 전공자만을 대상으로 한 본격 전문 철학서적이 아닌 것들(철학 1도 몰라도 처음부터 따라갈 수 있는 책들 위주)
2. 번역이 거지같지 않은 것, 혹은 애초에 한국어로 쓰여진 것
3. '인문학 팔이' 안 하는 책. 즉 철학을 공부하면 인생이 이렇게 풍요로워지고 성공하게 된다는 식의.. 자기계발서 풍의 책들이 아닌 것.
4. "철학사"가 아닌 것. 왜 철학사 책은 추천하지 않냐면.. 철학에 대해서 아무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 철학사부터 붙잡으면 너무 노잼이기 때문이다. 아마 중세까지 가기도 벅찰 것임. "철학사"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와 논쟁들 중심으로 정리된 것들을 추천함.
사실 대중을 상대로 한 교양 철학서, 미학서가 상당히 많은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움. 철학/미학 관심있는 사람은 어설프게 칸트 헤겔 니체 같은 것 원전부터 읽지 말고 아래의 입문서부터 시작하길 권합니다. 자신감만 앞서서 전문적인 철학 공부 훈련 없이 원전 혼자서 읽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사람 한두명 본 게 아님. 전문가들이 쉽게 떠먹여주는 책들 많으니까 그런 책들 먼저 보고 감을 잡은 뒤에 원전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철학]
1. 김필영, <5분뚝딱철학> 1, 2권
- 유튜브에서 유명하지 않나? 철학 유튜버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임. 저자가 철학박사 학위가 있고, 철학을 '인문학 팔이'로 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전문적 학문으로 대하고 있음. 그런 사람이 한국어로 쉽게 쓴 철학 입문서는 귀하다.
2. 나이절 워버턴, 최희봉 옮김, <철학의 주요문제에 대한 논쟁>
- 나이절 워버턴은 영국 철학자인데, "사짜"가 아니면서도 철학의 대중화에 상당히 노력을 많이 기울이는 사람임. 영국의 방송통신대학교인 '개방대학교(Open University)'에서 교수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음. 영국에서 철학 팟캐스트도 오래 했고 철학 비전공자를 위한 대중서도 상당히 많이 썼음. 저자 자체가 철학에 대한 전문성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 책은 뭘 봐도 퀄리티가 보장된다.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는 것들이 좀 있다.
3. 나이절 워버턴, <철학 한입>
- 2번의 저자가 했던 팟캐스트를 모아서 책으로 낸 건데(아마 팟캐스트도 동명일 듯. Philosophy Bite라고 찾으면 나올 것임), 현직 철학자들과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대담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음. 현재는 절판되긴 했는데 중고서점 같은 데서 구해볼 사람은 구해보면 좋을듯. 근데 철학에 아무런 기초가 없으면 조금 따라가기 어려움. 현직 철학자들과의 논의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은 안함. 근데 호흡이 짧고 다양한 주제가 들어 있어서 재미는 있다.
4. 스티븐 로, 하상용 옮김, <철학 학교>1, 2
- 고등학생 수준의 책임. 이것도 철학 '문제' 중심인데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미학 등 철학 제반의 문제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어서 좋고,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편. 실제로 가르칠 때 교재로 자주 사용함.
[미학]
1. 오종환, <(교양인을 위한) 분석미학의 이해>
- 미학이 무엇인지 기초부터 알고 싶다면 이 책부터 시작해라. 이 책 저자는 서울대에서 미학을 오래 가르치고 지금은 은퇴한 미학 교수인데, 서울대 미학과 입문수업의 강의록이라고 생각하면 됨. 체계적이고 정확하고 설명이나 예시들도 이해 쏙쏙 잘되게 써져 있음.
2. 이해완, <불온한 것들의 미학>
- 예술이나 미가 아니라 조금 다른 주제들, 예를 들면 농담이나 공포영화, 포르노그래피를 미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추천. 과거의 흘러간 미학이 아니라 지금 현대 미학자들이 하고 있는 이론과 논의를 잘 살펴볼 수 있음.
- 서가명강 시리즈라 유튜브에서 저자 강의도 볼 수 있다. 이해완이라고 검색하면 나옴.
3. 마거릿 P. 배틴, 윤자정 옮김, <예술이 궁금하다>
- 예술에 대해서 얼마나 다양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추천. 어떤 물음들이 있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략적인 답들도 설명은 해주고 있다. 철학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사례들과 질문들을 많이 던지는 책이라서, 사놓고 한번씩 생각날 때 조금씩 보는 것이 좋음.
4. 김진엽, <예술에 대한 여덟가지 답변의 역사>
-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철학적 답변들을 잘 정리해놓은 책. 진짜 쉽게 썼고, 정확하다.
4-1. 노엘 캐럴, <예술철학>
- 김진엽의 책이 다 소화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로 추천하는 책임. 결국 같은 내용("예술이란 무엇인가?")을 설명하는 책이기는 함. 근데 조금 더 철학의 전문 용어로 설명해주고 있으며, 철학적 논증을 실제로 보여줌. 대중 입문서라기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정통 미학서에 가깝다. 난이도가 조금 높아서 4-1.로 뺐음.
5. 박일호, <미학과 미술>
- 미술사를 따라가면서 미학과 예술작품의 관계를 훑는 책. 고대 미술부터 중세, 르네상스 등을 따라가면서 그 시기에 왜 그런 예술작품이 등장했으며, 그 작품들과 양식들이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체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음. 완전 순수 철학보다는 미술사 쪽에 관심이 더 있으면 이 책을 추천한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꼭 칸트 헤겔 원전을 읽어야만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현직 철학자들 중에서도 헤겔이나 니체 원전은 다 안 읽어본 사람 많을 것임(자기 전공이 아니면). 그런 원전부터 잡았다가 지레 겁먹고 도망가지 말고 재밌고 쉬운 책부터 시작하기를 추천합니다. 철학 재밌다.. 츄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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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 추가함. 너무 영미분석계열 책들만 추천했나 싶어서...
조금 더 난이도가 있거나/대륙철학 계열 논의를 포함하고 있거나/미술-시각문화 이론 쪽 책들.
[추가]
1. 게오르크 W. 베르트람, 박정훈 옮김, <철학이 본 예술>
- 일단 번역자가 아주 믿을만함(독일미학 전공하고 현재 서울대 미학과 교수). 대륙미학 계열(헤겔, 하이데거, 니체, 벤야민, 아도르노 등)의 논의를 포함하고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 읽히며, 짜임새가 좋은 책임. 역사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주제에 따라 논의가 묶여 있어서 좋다.
2. 하선규, <서양 미학사의 거장들>
- 저자는 오랫동안 홍익대 예술학과/미학과의 이론적 조류를 책임져 온 학자임. 정확하고 체계적일 뿐 아니라 문장력도 매우 좋다. 한국어 철학 글쓰기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참고가 많이 될 것 같다. 고대-중세-근대-현대를 통틀어서 중요한 미학자들의 논의를 잘 짚어주고 있음. 걍 하나 갖고 있으면서 심심할 때 백과사전처럼 보는 것도 좋음.
3. 매튜 키이란, 이해완 옮김, <예술과 그 가치>
-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예술의 '가치'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책.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백과사전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논의가 쭉 이어지기 때문에 예술의 가치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주장들의 짜임새를 그려가며 읽기 좋다. 위작의 문제, 예술과 미의 관계, 예술과 지식, 예술과 도덕 등 논쟁적인 주제들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음.
4. 김율, <서양 고대 미학사 강의>
- 개 멋있는 책임. 저자가 고대-중세철학/미학 분야에서는 국내 손꼽을 만한 전문가임. 문장이 정말 훌륭하고, 내용도 너무 좋다. 같은 저자가 중세미학에 대해 쓴 <중세의 아름다움>도 매우 좋다.
5. 조주연, <현대미술 강의-순수미술의 탄생과 죽음>
- 오랫동안 서울대 미학과에서 미술이론 강의를 했던 저자가 자신의 오랜 강의를 묶어 낸 회심의 책. 핵심 화두는 '현대미술'이며, 모더니즘 이후로 현대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흘러가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미술사"가 아니라, "미술 이론사"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 후반부에서는 개념미술이나 차용미술 같은 매우 동시대적인 미술까지 다루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