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감당할 만큼만 힘들고 행복하다

아들이 쓰는 아버지 일기

by 함완



“사는 게 심리학인데, 왜 내가 그걸 반대했나 모르겠다. 내가 배운 게 없어서…”


아버지는 평소라면 주무실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 전화를 걸어 왔다. 아버지가 전화를 거시는 일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하니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이 들었지만, 얼큰하게 취하신 아버지의 혀짧은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고3 시절 내내 심리학과에 가겠다고 이야기를 해둔 터였다. 마음이 항상 궁금했다. 내 마음조차 모르는 게 너무 신기했다. 부모님은 심리학이 뭔지 잘 모르셨을 거다.


돈 되는 공부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신문방송학과를 염두에 두고 사회과학부로 입시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막상 돈이 되는 건 지금 보니 심리학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러셨다. 동생들 가르칠 게 아니라 날 가르쳤어야 했다고. ‘배운 놈들이 못 배운 너보다 못하다’라고.”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신 할아버지를 따라 산과 산을 넘으며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큰아버지와 삼촌들이 고등학교까지 나와서 머리 좀 굴리며 사업 좀 해보겠다고 집안을 말아먹을 때, 아버지는 피와 땀으로 성실하게 일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사업자금을 요구할 때마다 아버지는 이게 마지막이라며 그들에게 돈을 내어주었다.


“마음을 잘 알아야 해. 나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게, 첫 번째가 부부, 두 번째가 자식, 세 번째가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걸 잘 아시는 분이 엄마에게는 왜 그리 무뚝뚝하신지 묻자, 그걸 다 말로 해야 아는 건 아니라며 말을 돌리셨다. 평생 그렇게 엄마를 사랑하는 모습 한 번 보여주신 적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난감하게 프로포즈를 나를 통해 하실 줄은 몰랐다.


“얼마 전에 족보를 했다. 56만 원이라는데 속는 셈치고 했어. 근데 아깝지 않더라. 네 형수네 부모님 이름까지 다 들어가 있더라고. 난 이걸 죽을 때까지 가보로 가져갈 거다.”


나에게는 그저 혈연관계도가 그려진 그 지도 한 권일 뿐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본인의 혈관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집이 더워 밖으로 나오던 중에, 아버지는 누나 이야기를 꺼내셨다.


“네 누나 마음도 이해가 돼. 얼마나 살고 싶을까.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거야. 어쩔 수 없어. 부모니까 내가 안고 가야지.”


난 항상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에는 무엇 하나 못 하는 게 없는 당신, 지금도 나보다 힘을 더 잘 쓰시는 당신. 나는 언제쯤에야 당신의 피를 조금이라도 물려받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짧은 침묵 후,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태어나고 나서 정말 행복했다. 나는 네가 몇 년간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괜찮아. 지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들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죄송해요, 고마워요’라는 말을 몇 번을 되짚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하루이틀 생각한 게 아니야. 사람이 마음을 알아야 해. 의사들도 말 한마디에 병 50%는 고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그만큼 중요한 거야.”


아버지는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마음을 열어보였다. 취기에 열어보인 마음이지만 그 마음에 너무나도 감사해 전화를 끊고 계단을 올라갈 때에는 사실 울고 싶기까지 했다. 이제서야 우리는, 다행히도, 가까워지고 있다.


누나가 내일은 치료를 받으러 서울에 첫 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한다. 아버지가 누나를 서울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지만 누나는 혼자 기차를 탈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누나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셨다.

오늘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들고 행복한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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