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어제, 오늘, 내일의 통화

by 함완


아들, 전화했었네? 엄마가 일할 때는 전화기 잘 안 들고 다니잖아. 주머니에 넣으면 자꾸 빠지더라고.
밥은 먹었고? 응. 엄마도 먹었지. 집에 와서 배고프니까 허겁지겁 떡 데워 먹었네. 밥 먹을 정신도 없고, 오늘 아침에 냉동실에서 떡 꺼내놨거든.


엄마는 언젠가부터 청소일을 다니셨다. 결혼 후 평생을 가정주부로만 살았지만 아버지가 페인트공 일을 그만두신 뒤로 엄마는 당신이 일해야겠다며 청소일을 알아보셨다. 처음에는 동네 바닷가의 작은 호텔로 일을 다니시다가, 이후에는 시내의 목욕탕으로 옮겼고, 마지막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계시던 요양원에서 일하셨다.


당시는 엄마가 바닷가의 호텔에서 일하실 때였다. 엄마는 토요일이면 일이 일찍 끝났고, 가장 편하게 통화할 수 있는 낮 시간대에 맞춰 도서관에 다녀오며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엄마는 떡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쑥떡. 쑥이 나는 철이면 마을 언덕과 길가에서 쑥을 바구니 한가득 뜯어와 쑥개떡을 만들었다. 쌀가루에 쑥을 넣어 만들었을 때는 연두색이었던 것이, 찜솥에 들어가 한참 있다 나오면 진하디진한 녹색을 뿜어냈다. 쑥을 눈과 입으로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었다. 한 번에 만들어두고 냉동시켜 두면 한참을 즐길 수 있는 엄마의 쑥떡은 나에게는 왠지 질기고 손에 달라붙기만 해 불편한 음식이기만 했다. 엄마가 건네면 먹는 시늉만 하며 내려놓았던 사랑.


오늘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할머니 댁에 온 게 벌써 1달이 넘었다고. 벌써 그렇게 됐나 싶더라고. 엄마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 모르겠어.

근데 아들도 알잖아. 엄마도 매일 새벽같이 일 나가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할머니 댁 갈 정신이 있니, 기운이 있니. 아버지는 그래도 가끔씩 와서 청소도 해주고 그래야지, 어떻게 그렇게 발 딱 끊고 안 오냐고 그러는 거지.


엄마가 청소일을 다니면서 엄마의 시부모, 아버지의 부모를 돌보는 일은 아버지가 전담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는 데다가 노환으로 거동이 거의 불가능했고, 할머니는 거동은 가능하긴 했지만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혼자서 두 분을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며느리로서 기본적인 역할은 해야 한다고 믿는 옛날 사람이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그 역할을 엄마가 다 하지 않는다며 섭섭해하셨다. 아버지의 무뚝뚝함과 애정 없는 말투에 대해 엄마 편을 들어주며 엄마의 마음을 달래드렸다.


그치? 느이 아버지 평생 다정하게 한 번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버럭 승질이나 낼 줄 알지. 할머니가 그러시더라. 어렸을 때부터 한 번 삐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먼저 말 한 마디 안 한다고.

아들도 그래? 아들은 그래도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그래, 그거 좋은 거 아냐. 고쳐야 해.


전혀 놀라울 거 없이 나에게도 아버지처럼 감정이 상하면 말을 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나의 삐침의 극단적인 기억은 형의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는데 그때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가족사진을 찍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사진에는 모두의 어색한 얼굴과 함께 내 검디검은 곱슬머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 피는 어디로 가는가.


저번에 일 끝나고 바로 할아버지네로 갔는데, 문 열자마자 똥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코가 깨져. 깨져.
할아버지가 몸 제대로 못 가누시니 변기에 앉아서 똥을 싸도 제대로 처리를 못하시는 거야.
어쩌긴. 여기저기 락스 뿌려서 청소하고 할아버지 씻겨드리고.


듣는 동안 그 장면이 상상되었지만 상상되지 않았다.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그 장면들. 엄마는 할아버지의 똥오줌을 다 치우고 뒷처리를 해주셨다. 나중에야 할아버지의 오줌을 통에 받은 뒤 물수건으로 닦아 깔끔하게 뒤처리하시는 엄마를 보며 사람을 정성스레 돌본다는 것에 대해 배웠다. 서로의 관계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상대를 위하는 일. 엄마가 소변을 보면 내가 엄마를 닦아주고 했던 게 전혀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해보면, 사람을 돌본다는 일은 깨끗하게 씻겨주는 게 아니었나 한다.


할머니가 빨리 죽어야겠다는 말씀하시는 거 다 거짓말이야.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밥숟가락 들 수 있으면 살고 싶은 게 사람인데. 노인네가 그 소리 얼마나 오랫동안 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두 분 중에 한 분은 가셔야 되는데. 물론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실 때에도, 돌아가시기 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에도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다들 너무 고생이야. 너희 아버지랑 같이 한 자리에 누워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쪽으로 모시고 나서는 매일 거기 가잖니. 아침, 저녁 챙겨드리고 저녁이면 방에 불 때드리고. 너희 아버지도 대단해. 기름값 많이 나오니까 불 땔 수 있게 아궁이 만들고, 창문까지 대서 밖에 볼 수 있게 해놨잖니. 아버지 아니었으면 기름값 엄청 들었을 거야.

사람들이 그러더라. 아버지한테 효자상 줘야 한다고. 요즘 누가 저렇게 하냐고. 엄마가 봐도 대단해. 진짜 저런 효자는 세상에 없을 거야. 근데 엄마는 힘들어. 엄마가 필요할 때 아버지가 없거든.


아버지는 동네에서 이름난 효자였다. 다른 형제들이 고등학교까지 다니며 학업을 다했지만, 아버지는 국민학교만 마치고 할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니며 나무를 했다. 그런 아버지는 묵묵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어느 날 본가에 내려갔을 때였다. 아버지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우리는 술을 마셨고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던 자신의 옛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형제들이 다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아버지는 열다섯 살에 혼자서 이십 리 떨어진 공사판에서 일을 마치고 시꺼먼 밤을 걷고 걸어 집에 왔다고 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아들을 위해 할머니는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두었던 따뜻한 밥으로 아들의 늦은 저녁 밥상을 차려주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며 열다섯의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평생의 외로움을 뚝뚝 흘렸다. 자식을 셋이나 두었지만 그의 나이 일흔이 다 되도록 누구도 그의 삶에 대해 물은 적 없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없었고, 그날 밤 아버지가 흘린 눈물을 오래 잊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런 적도 있었어. 몸이 천근만근이라, 움직일 수도 없고 감기가 왔는지 온몸이 으슬으슬 땀 나고 추워서 너무 아픈 거야.

근데 네 누나가 엄마를 신경 써줄 정신이 있니, 몸 상태가 가능하니.

느이 아버지는 술 마시고 9시면 자요. 그럼 엄마는 아파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옆에라도 있으면 약 좀 사오라고 말이라도 하지.


엄마는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다. 두 분이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중매로 결혼했음에도, 두 분이 뜨겁게 사랑했던 적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음에도 엄마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사랑받고 싶어 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에 대고 절도 한다던데”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엄마.


이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누나는 끄떡하면 병원 입원하지, 하루 종일 집에서 몸 흔들고 있지.

엄마는 그거 보면 가슴이 꽉 막힌듯이 답답해. 밥 먹을 때에는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르겠다니까. 먹지도 못하고 아파서 저렇게 낑낑대고 울어대는 애를 앞에 두고, 죄인처럼 밥 먹은지가 몇 년째니.

네 누나랑 자주 싸워도 엄마라 그런지 자고 있는 모습 보면 불쌍하고 안쓰러워. 아파서 삐쩍 말라갖고, 마음이 짠해서 손이나 발이라도 만질라치면 승질을 얼마나 내는지.


누나는 몸에 통증이 심해지면서 통증을 달래기 위해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몸을 흔들지 않거나 누워서 자거나 라고 할 정도로 누나의 고통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는 그런 누나를 보며 또 죄인이 되었다.


누나는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엄마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극도로 꺼렸다. 그것은 엄마에 대한 거부였다기보다 자신의 병에 대한 그것을 안고 보듬어주려는 이에 대한 모든 거부였는데, 자신의 병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누나는 모든 위로와 걱정을 온몸으로 밀어냈다. 그 슬픔을 누나가 떠난 뒤에서야 깨달았다. 누나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병과 집안을 가득 채운 자신이 사모아둔 물건이었다.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않고 누나는 자신의 물건으로 성을 쌓아갔다. 그 성에는 누나의 허락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도 누구도 만져서는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했다. 누나의 성이 높아져갈수록 가족들은 누나에게 하나둘 잔소리를 해댔고 그럴수록 짐들을 가운데 두고 서로의 언성이 높아져만 갔다.


엄마는 너희 같은 형제하고 달라. 형제는 안 볼 수 있어도, 엄마는 그래도 새끼라 미워도 미워할 수가 없어.

엄마가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그때 하도 울어서 이제 눈물이 말랐다. 옛날 같으면 저거 보고 있으면 진짜 맘이 찢어져서 눈물 많이 흘렸을 거야. 근데 이제 몇 년이니. 네 누나 그렇게 아프기 시작한 게 20년이야. 병원에 입원하고 그런 게 10년이 다 되가.

엄마도 이제 옛날 같이 그렇게는 안 하지.


엄마는 그렇게 만질 수 없는 딸을 옆에 두고 눈물만 삼켰다.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휴지를 가져다 드리고 손을 잡아드리는 것뿐이었다.


아들 언제 내려올 거야? 엄마 쉬는 날 맞춰야 되니까 미리 말해줘야 돼. 알았어. 매니저한테 얘기해놓아야겠다. 며칠 있다가 갈 거야? 이틀? 아, 이틀 자고 간다고? 서울에서 할 일 있나? 요즘 학원다닌다고 했지?

그럼 어쩔 수 없지. 엄마야 아쉬워서 그렇지. 아들이랑 시간 많이 보내고 싶은데.

그래. 아들 늦었다. 잘 시간 한참 지났네. 그래 아들도 잘 자고.


엄마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니면서부터 우리는 짙은 시간을 함께했다.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직접 목격했고, 부여잡았다. 그 시간은 오랫동안 나를 살아있다는 감각을 부여해주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디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찾아야 할 줄 몰랐다. 그렇게 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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