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다. 어제저녁, 바람이 선선해진 느낌이었다.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바람에는 열기보다는 시원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벌써 가을의 초입이라니. 날씨만 봐서는 여름이 몇 주는 더 우리를 괴롭혀야 끝날 듯하지만, 달라진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이제 또 한 계절 지나갔구나'라며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초조해진다.
퇴사를 한 지 벌써 9개월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오래 일을 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취직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망설였다. 몇 년 전부터 엄마의 항암과 치매 치료를 위해 병원에 엄마를 모시고 다니는 일을 전담하고 있어 한 달에 평일 최소 2일에서 6일 정도의 휴무가 필요했다. 시간제 알바가 아닌 어떤 정규직 일자리도 이런 내 상황을 고려해 채용을 진행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의 내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정말 여차하면 알바라도 하면서 먹고살자.' 퇴사 전,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엄마는 회사 관련된 내 걱정거리를 들을 때마다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 엄마, 아빠 이렇게 아직 살아있고, 너도 뭐든 해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젊어."
직장을 바로 구하지 않는 대신, 시골에서 엄마가 서울 병원에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좀 더 신경 쓰기로 했다. 차로 엄마를 모시고 편도 3시간 남짓 걸리는 길을 오갔다. 1년에 몇 번 겨우 방문했던 고향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누나도 자주 만나게 되었고, 아버지와도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퇴사를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누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뇨합병증으로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던 우리 가족들은 누나가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엄마의 말처럼 "허망하게 떠났다." 임종의 순간을 지켜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집으로 왔고, 장례식장으로 누나를 옮겼다. 장례는 이틀 동안 치러졌다. 가족친지들과 동네 어르신들만이 왔다. 누나의 지인은 누구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오지 못했다.
누나는 떠났고, 자기를 잊지 말라는 듯이 작은 선물을 주고 갔다. 옴이었다. 약을 발라도 사라지지 않는 가려움에 누나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도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치료에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끝없이 이어지던 가려움, 진절머리 나게 빨래를 삶았고 스팀 청소를 했다. 옴 증상이 사라진 건 몇 달이 지난 4월 말 즈음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마냥 쉬고 있지만은 않았다. 퇴사하자마자 친구는 홍보성 글쓰기 알바를 소개해줬다. 알바를 하면서 숨만 쉬고 살면 될 정도의 돈을 벌었다. 친구는 당부했다. "이 일은 회사를 다니면서 해야 하는 일이야. 이 일로만 먹고살 수는 없어." 친구의 조언은 무섭도록 정확했다. 꾸준히 일이 들어올 때에는 재택으로 글만 써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에 장밋빛 미래를 꿈꿔보기도 했지만, 점점 일감은 줄어들었고 한 달에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게 지난달이었다.
여름이 왔다. 책을 만들어보겠다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출판사 사업자를 냈다. 좋아하는 것이 책이었고 사랑하는 것이 글이었다. 출판사에서 일한 경력도 있었으니 충분히 책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편집자로서 책을 만드는 것과 자본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1인 출판사로서 책을 만드는 일은 시작부터 다른 길이었다. 같은 산에 간다고 생각했지만, 회사에서는 오르막에 계단도 있고 도착지를 알려주는 이정표도 있었다. 내가 가는 길에는 잡초와 나뭇가지들만 무성한 건지, 낫으로 하나씩 베어내며 길을 내는 일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하루에 10미터나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어쨌든 가기로 한 길이니, 뭐라도 하겠다고 애써보고 있다. 계절은 이제 가을에 접어든다. 좀 있으면 퇴사를 했던 11월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책 한 권을 낼 수 있는 글을 써내거나, 다른 사람의 책을 만들고 있기를 희망한다. 올해 남은 기간 할 수 있는 한 낫질도 하고 바닥도 발로 다지며 길을 내보기로 한다.
매 순간 삶의 기로에 서 있다. 앞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은 기로에 선 우리에게 적극적인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몰라 때로 선택을 피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이다. 그저 받아들이고 다시 또 다른 선택을 하고 묵묵히 이어나갈 마음을 다지는 일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