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보다 중요한 대처법
엄마와 딸 사이는 가장 특별한 관계라고 한다. 엄마는 딸을 자신과 동일한 자아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딸과의 관계에서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또 다른 특이점들이 드러난다.
나 또한 나의 딸이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아이를 낳는다면 나는 이렇게 잘해줘야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딸은 내가 될 수도 없고 내가 되어서도 안된다.
한 아이를 키우는 가장 큰 목적은 그 아이가 성숙하고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엄마로서 나는 어디까지나 서포 터지, 절대 그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세상에 완벽한 엄마란 없고 나 역시 그러하지만 나는 그저 아이의 찬란한 빛 가운데 아이 곁에 따뜻한 그림자, 언제든 찾아와서 쉴 수 있는 그늘로서 머물면 그뿐이다. 조연이든, 엑스트라든 나는 절대적이고 충실한 서포터로 아이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엄마들은 딸과 자신을 동일시 한 나머지 선을 마구 넘어온다. 스스로가 독립된 자아가 아니기에 딸을 통해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더 안타까운 건 좋지 않은 경우 딸에게 그 스트레스를 쏟아내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기도 한다.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은 인생 전반에 걸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가끔 중요하지 않은 대부분의 일들에 파묻혀 이것을 잊고 한다.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함으로부터 채워져야만 자신의 아이들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엄마가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면, 그 딸은 엄마와의 관계가 참 어렵다. 어릴 땐 느끼지 못하던 불편함이 명확해지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란과 자책이 가중되며, 본능적인 불안과 버려질까 봐 느끼는 두려움을 기저에 지니고 산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릴 때는 누구보다 자신만만하던 아이가 나였다. 커서도 그 모습은 이어졌다. 겉은 화려했다. 그때의 나는 속은 빈 껍데기였다. 가끔 나도 모르는 불편함과 두려움이 올라오면 나는 얼른 그것을 덮어 외면해 버렸다. 흠결 없고 멀쩡한 잘 나가는 내 모습이 더 좋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내가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모두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한 남자가 나타났을 때, 나는 바로 결혼을 결정해 버렸다. 결정은 물론, 내가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존재의 버려짐과 부정당함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을 빠르게 한 번에 해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결핍으로부터 출발한 동기는 항상 끝이 좋지 않다. 완전한 충족은 결코 얻을 수 없고, 결핍의 상태는 마치 휘어진 돋보기처럼 정확한 인지를 어렵게 한다.
다행히도, 나는 삶의 가장 밑바닥이 순간에 진짜 나를 제대로 보게 됐다. 내가 하두 봐주지 않으니까 제발 좀 보라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적으로 완전한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삶에 엄청난 안정감이 찾아왔다. 항상 조급하고 열심히 살아도 불안했던, 안 그런 척했지만 남의 눈치를 엄청 보고 살았던 내 삶은 다시 나의 시선에서 시작됐다.
그것은 내 삶의 가장 큰 전환이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평생 나로 살지만 진짜 나를 들여다 보고 나를 위로한 적도 없다니, 우리 모두는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제야 나는 진짜 나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정말 은혜고 가문의 영광이다.
깨달음의 속성이 내가 깨닫는 게 아니라 깨달아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의 엄마는 나의 이혼에서부터 내가 가진 감정과 생각, 노력에 대한 모든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엄마의 표현방식은 나를 종종 화나게 하거나 선을 넘었다. 이것이 왜 불편한지를 말하면 내가 프로 불편러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수용은 평생을 가도 기대하기가 참 어렵다.
밖에 나가면 고상한 척, 좋은 사람인 척, 경청하면서 체면 치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더욱 불편했다.
내가 진짜 나로서 살아가면서부터 엄마의 행동이 더욱 이해가 되고, 분별이 되었다. 처음엔 그것이 나를 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분별을 미움으로 쓰지는 말자.
나는 엄마와의 소통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내가 요구하는 그 선에 대해서 엄마는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지켜줄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만나지 않는다.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모녀 사이가 이렇게 되다니 참 유감이다. 한편으로는 슬픈 부분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슬프니까,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버리려는 게 무지하고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그런 식으로 성급하게 해결하고 싶지 않다.
성급한 사과는 때때로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성급한 용서는 독약이라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엄마를 보지 않는 이 시간이 평안하다. 엄마가 자신의 삶에서 생긴 이 이벤트에 대해서 이제는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 찬찬히 둘러보기를, 나는 엄마에게 기회의 시간을 선물했다. 그것을 볼 지 말지는 엄마의 선택이니, 그 또한 내 손을 떠났다.
엄마가 딸과의 단절감을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때를 위하여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내가 할 것은 멀리서 기도해 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엄마가 엄마의 진짜 삶을 살길 바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 오로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뿐이다.
고통은 아프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레슨이 있다. 그 고통을 그저 묵묵히 받아내고 내 삶에 어떠한 교훈을 주려는 건지를 들여다보면 결국은 고통이 내 편이었음을, 나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되어가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불편한 관계에 대한 대응법을 손절하라고 가르쳐준다. 나도 사회적 관계에서는 때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내지 말고, 상대방과의 화해와 용서와는 별개로, 이것을 나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곰곰이 살펴보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손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는 각 사건들이 하나의 레슨 챕터인 셈이다. 내가 내 삶을 더 면밀히 관찰하고 새겨볼수록 내 삶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짐을, 관찰하지 않는 삶은 무늬가 없다.
각자의 고유한 무늬가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로운 그림이 되도록, 그 그림은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우리 고유의 무늬 하나하나가 모두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알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