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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웜띵 Dec 05. 2022

선량하게 불합리한 말 “너를 위한 거야”

혼자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나는 3치 종합세트 인간이다. 음치, 박치, 몸치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골고루 갖추었다. 바람에 낙엽이 빙빙 나뒹구는 가을의 끝자락, 나의 몹쓸 내적 가무는 기어코 밖으로 새어 나오고야 만다. 온갖 겨울 동요와 캐럴 멜로디에 먹칠을 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크리스마스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자성하듯 그림책을 읽었다. 그러는 틈에, 아이는 알록달록 반짝이는, 책 속의 트리들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다. 징글벨을 들으며 아이는 짧은 두 팔을 뻗어 허공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휘적휘적 그렸다. 또 날마다 트리에 걸고 싶다는 것들이 늘어갔다. 자동차, 기차, 버스, 사탕, 개 밥 등등.




  며칠 뒤, 우리 세 식구는 일찍이 대형 쇼핑몰로 향했다. 아이가 그토록 원하던 트리를 직접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에게 충만한 크리스마스를 선사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차올랐다. 아이 역시 설렘이 가득했는지 가는 내내 단 한 번도 끔뻑 조는 법이 없었다. 차만 타면 얼마 못가 잠들어버리곤 했던 아이였는데도! 각자 부푼 마음을 키워나간 끝에, 이윽고 우리 셋은 형형색색의 트리가 늘어선 매장 앞에 섰다.


“여보, 아무래도 이건 너무 작고, 저건 또 너무 크지? 아무래도 우리 거실에는 110cm짜리, 이게 좋겠어.

장식도 골라보자.” 나는 말했다.

“금색 세트는 별이 들어 있어서 더 예쁘긴 한데, 반짝이가 과하지 않아? 째니 입에 들어가면 안 좋을 것 같으니 레드 세트로 가자.” 남편은 말했다.

“그래. 다른 장식도 펠트지로 만든 걸로 고를게.

째니 입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나는 말했다.

아이는 내가 선 곳 아래쪽에 놓여 있던, 자동차 모양의 캔들 워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어, 이건 깨지기 쉬워. 다칠 수 있으니까 우리 저쪽으로 가 있자.” 남편은 아이 손을 잡고 자리를 뜨며 말했다.

“빨강..! 뛰뛰빵빵…!” 아이(=째니)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남편이 아이를 입출구 쪽으로 안전하게 몰아준 덕분에 서두르지 않고 무사히 결제를 마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트리를 가지마다 힘주어 펴고 장식을 걸었다. 몇 번이고 몸을 뒤로 뉘었다 바로 했다 하면서 트리를 완성했다. 셋이 함께 꾸미는 첫 번째 트리였으니 조금이라도 풍성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에 들인 공은 깎이고 말았다. 트리 옆을 지나면서 아이는 자꾸만 자동차 모양의 빨간 캔들 워머를 찾았다. 그토록 노래 부르던 트리가 눈앞에 있는데 왜 애먼 것을 찾을까 싶어 섭섭해지려 했다. 우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트리를 사러 간 거였다고, 게다가 그 자동차는 굴러가지도 불빛이 나지도 않는 것이었다고, ‘우리의 트리’에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치며 아이를 타일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는 놀이매트 위로 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미니카들을 굴렸다. 등을 굽히고 한껏 상체를 바닥에 붙인 채.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옆에 놓인 트리가 ‘우리의’ 트리가 아니라 ‘나의’ 트리였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새 물건 들이는 걸 아주 질색한다. 그런 탓에 이번 트리 쇼핑은 내게 꽤나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말끔한 거실을 사수할 것이냐, 아이에게 소소한 행복을 안겨줄 것이냐 하는 양자 대결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벌어졌다. 결국 승자는 아이의 웃음을 위하는 쪽이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욕심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할 줄 아는 엄마임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결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의심하고 검증했어야 했다.


  트리의 크기를 정하는 순간부터 장식을 고르는 순간까지, 아이에게 의견 구한 적이 없었다. 쇼핑하는 동안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내 옆에 서 있었지만, 나는 아이가 아닌 남편에게만 의견을 물었다. 우리 아이는 너무 어려서 우리집에 걸맞을 트리를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 우리 아이는 아직 경험이 없어서 반짝이가 얼마나 호흡기에 나쁜 영향을 주고 집안을 더럽힐지 모를 거라는 확신. 이런 단정들로 나는 아이에게 깍두기 시킨 엄마가 되어 있었다. 티비장 오른편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는, 아이에 대한 존중이 증발해버린 선택들의 결과물에 불과했다.


트리 옆 깍두기 된 아들래미..


  집 안에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물건들이 또 있나 둘러보았다. 토끼가 그려진 하늘색 이불이다. 두 달 전, 아이의 겨울 이불로 최종 네 상품을 골라 두었다. 일주일간 상품평 수백 개를 읽어낸 뒤 네 가지 중 1위를 점찍었다. 그래도 아이를 ‘존중’하기 위해서 아이에게 뭐가 가장 좋겠느냐고 물었다. 아이의 검지는 내 마음속 4위를 가리켰다. 아뿔싸, 그거 엄마들이 진짜 별로라 했는데. 아이에게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에 다시 골라보게 했지만, 엄마의 답정너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며칠 고민한 끝에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선택을 따랐다. 그런데 물건을 받고 보니 아이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하게는 너무 만족스러워 아이에게 재고해보십사 했던 지난 내 모습이 부끄럽기까지 했었다. 사실 아이가 덮을 이불이었기에 아이가 고르면 그만이었다. 그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건 어리숙한 아이가 아닌, 오만한 나였다. 존중하려는 마음이 선을 넘는 순간, ‘강압’ 또는 ‘무시’라는 결코 선할 수 없는 낱말들로 변모하게 된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아이의 이불을 보며 다짐했었다. 이 선한 얼굴을 한 불합리함이 쉽사리 고쳐지지 않아 문제였지만.




  ‘널 위해서야.’라는 말은 참 순진하고도 무례한 듯하다. 종종 상대를 위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상대방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걸 보면 말이다. 보살펴야 하는 존재라서, 유약한 존재라서, 자신보다 사고든 신체든 불편한 존재라서, 상대방에게 내가 정한 선택지를 내밀곤 한다. 그 의도는 좋았으나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상대에게 최선이라 보였던 선택지가 꼭 아니더라도, 충분히 괜찮은, 아니 더 나은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우리 아이가 매일밤 포근하게 덮고 자는 하늘색 토끼 이불처럼.


  그러니 ‘당신을 위한다’는 선의에 취해 선의를 받아 마땅한 이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다. 그저 같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존중’의 의미 역시 이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존중하는 일에는 어떠한 이유도, 어떠한 차등도 붙을 수 없다. 이 당연함을 순진하게도 망각해버리는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오늘도 아이 앞에 앉은 나의 자세부터 고쳐 잡아본다. 우리가 아닌 내가 만든 트리 옆에서.


술이 아니라도 뭐든 취하면 일단 선은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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