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을 밀어 넣던 시간들
부우우우- 웅-
광양만에서 유조선의 낮고 긴 뱃고동 소리가 밀려왔다.
그 소리는 거대한 텅 빈 금속 증류탑 안으로 스며들며 울렸다.
탑 옆구리를 따라 길게 붙은 사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먼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다리를 꽉 잡았다.
검은 바다 위로 유조선이 조명을 깜빡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바다로 팔을 뻗은 항만 구조물이 보였다.
그 끝에는 커다란 배들이 작은 홍합처럼 붙어 있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마지막 발판 위로 올라섰다.
고층아파트 높이의 증류탑은
일정한 간격으로 원형 작업대를 두르고 있었다.
멀리 야간등이 환하게 켜진 광양항이 한눈에 들어왔다.
꼭대기의 바람은 거셌다.
나도 모르게 허리 높이의 난간을 꽉 쥐었다.
거친 바람에 가슴 한쪽이 쿡 찔렸다.
“요비 내릴게요!”
나는 아래 작업대의 원훈 형에게 소리쳤다.
어깨에 둘렀던 요비 철사를 풀었다.
고리처럼 꺾인 끝을 배선 파이프로 밀어 넣었다.
탑을 따라 곧게 올라온 파이프에는 굴곡이 없었다.
요비선은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늘 이것만 하고 시마이하자.”
원훈형이 아래에서 전선을 묶으며 말했다.
“0323 호출하신 분 계실까요?”
호출기에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호 씨예요? 여기 덕충동 사무소예요.”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방문드리려고 했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 수첩의 단아한 글씨체가 떠올랐다.
“정호 씨가 이제 성인이라 부양가능자가 되었어요.
음… 그래서 이제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제외될 거예요.
행정처리 해야 할 게 있으니 한 번 방문해 주시겠어요?”
짧은 숨이 한 번 섞였다.
“아, 네. 최대한 빠르게 방문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일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두 손으로 잡으며 머리를 숙였다.
“많이 못 도와드렸어요. 그래도 정호 씨가 있으니… 다행이에요.”
마지막 말이 조금 늦게 떨어졌다.
삐이이이잉-
점심을 알리는 사이렌이 금속 구조물 사이로 낮게 번졌다.
“한 십 분 뒤에 함바집 사람 좀 빠지면 가자.”
소장님이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하루도 안 빠지고 야간작업하면 안 힘들어?”
원훈 형이 현장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스무 살이면 쇠도 씹어먹지 뭐.”
소장님이 안전모를 벗으며 드러난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니 스무 살이면 놀아야지. 한참인데.”
원훈 형이 안전모를 구석에 쌓인 둘둘 말린 전선 위로 던졌다.
“저녁도 해결하고 돈도 더 벌 수 있잖아요.”
나는 웃으며 꼬인 요비선을 풀었다.
“소장님 저… 내일 오후 두 세시쯤 조퇴 좀 해도 될까요?
동사무소에 들려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나는 목 뒤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안되는데? 정호 없으면 우리 일을 못하잖아?
자 그럼 내일은 모두 야근하지 말자.”
소장님이 웃으며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다.
“정호 덕분에 내일 저녁엔 쉬는 거야?
그럼 소장님 정호 빼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원훈 형이 소주를 들이켜는 흉내를 냈다.
컨테이너 사무실의 웃음소리가 공단으로 퍼졌다.
동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용한 사무실에 타자기 소리만 들렸다.
나란히 놓인 책상마다 직원들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둘러보게 되었다.
“저… 박은주 주사님 뵈러 왔는데요.”
입구 옆 작은 책상에 방위병이 앉아 있었다.
“여기에요!”
조용한 사무실 안쪽에서 또랑 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십 대 초반의 단발머리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정호 씨죠? 반가워요. 거기 앉아요.”
책상 위에 ‘주사보 박은주’라고 적힌 나무명패가 놓여있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허리가 편찮으시고,
장남 두호 씨가 장애인이라 생활보호대상자였는데…”
그녀는 서류뭉치에서 우리 가족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페이지를 폈다.
“이제 정호 씨가 근로 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정호 씨 가족은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녀는 손을 맞잡은 채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
“여기에 사인하면 돼요.”
우리 가족의 이름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
1995년 6월 7일, 날짜를 적었다.
그녀가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7월 입대를 연기하는 게 어때요?”
그녀는 서류를 돌려받아 책상에 넣었다.
“네, 연기 신청하려고 합니다.
동사무소에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풀렸다.
“자 이거 작성해요. 한두 번 연기는 어렵지 않아요.”
그녀는 다른 직원에게 서류를 받아와 나에게 건넸다.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고 사유를 한 줄 써넣었다.
‘대학 진학 준비’
“다행이에요. 아버지가 걱정이었는데….
그런데 아버지랑 함께 지내는 게 어때요?
거동이 좀 많이 불편하시잖아요.”
그녀는 잠깐 웃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게….”
나는 망설였다.
“실은 제가 결핵치료 중이라… 옮길까 봐…
다음 달 검사 때 검출 안되면 그때….”
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네? 그래서 얼굴이…
아… 어떡해야 되지….”
그녀는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여천석유화학공단의 탱크와 배관들은 거대한 쇳덩이의 몸 같았다.
우리는 그 몸속에 전선을 밀어 넣었다.
입선작업 - 한쪽에서 넣고, 다른 쪽에서 끌어냈다.
높은 곳을 타고 오르는 배관도 있었고,
사람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큼 좁은 통로도 있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건 줄다리기 같은 노동이었다.
나는 그때, 막 세워진 정유공장의 몸에 혈관과 신경을 붙이고 있었다.
갈고리를 반대편으로 밀어 넣을 때면
꺽인 엘보 구간에서 자주 걸렸다.
철사를 살살 비틀어가며
한 번 당겼다가, 다시 밀어 넣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야 겨우 통과했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쑥 지나갈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전부 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달라졌다.
철사를 따라,
보이지 않는 엘보의 굴곡이 느껴졌다.
어디에 걸렸는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풀리는지,
조금씩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가끔은 끝내 통과되지 않아
엘보를 분해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끌어오던 전선이
중간에 툭- 빠져버리는 날도 있었다.
다시 빼내고, 다시 묶고, 다시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시간은 없던 일이 되었다.
내가 배운 건 하나였다.
다시 하는 것.
실패해도 다시 해야 한다는 것.
그 일은 결국 끝까지 갔다.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실패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끝까지 갔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인생도 비슷하다는 걸.
“여보세요? 정호 씨! 동장님이랑 말씀 나누었는데….”
내 이름을 밝게 부르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아버지가 다시 일하시기는 힘들 것 같고,
두호 씨는 스물여덟이지만 장애인이시고…
이제 대학생이라…
그리고 정호 씨가 없으면
몇 년 동안은 집안이 힘들 것 같아서…
음… 정호 씨 군면제 신청을
해보려고 하거든요?”
‘군면제 신청’이라는 말에 갑자기 많은 생각들이 섞였다.
“정호 씨, 생계 곤란 사유로
면제 신청이 가능하거든요….
영장에 인쇄된 문구가 갑자기 떠올랐다.
'신체등급 1급, 현역대상’
“연기신청서는 아직 제출 안 했어요.
동의하면 우리가 면제 신청서를 작성할게요.”
“네… 주사님… 어….”
툭- 가슴에서 갈고리와 전선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가장 높은 증류탑에 올랐다.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공중에 멈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오히려 고요하게 날개를 펴고 쉬고 있었다.
몸을 약간 기울더니 오른쪽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나는 바닥의 요비선을 들어 올렸다.
선 끝의 벌어진 갈고리를 손으로 눌러 좁혔다.
어둡고 깊은 배관 속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공화동 달방으로 가는 골목길 앞에 멈춰 섰다.
벌써 붉은 등이 몇 군데 켜져 있었다.
나는 돌아서 나와 시장으로 향했다.
“삼겹살 두 근만 주세요.”
주인이 붉은 등이 켜진 진열장을 열었다.
고깃덩이를 대중 잡아 썰어 저울에 툭 올렸다.
바늘이 빠르게 돌아 숫자 2와 3 사이에서 춤추다 2.5에 멈췄다.
주인이 고기를 자르려다 나를 보았다.
“총각 잘생겨서 두 근 반 줄게. 식구들이랑 맛나게 묵소.”
주인은 고기를 종이에 싸서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건넸다.
나는 봉지를 들고 아버지에게 향했다.
걸으며 하늘을 보았다.
거의 둥근달이 전선에 걸려 따라왔다.
한 걸음 옆으로 옮겨 달을 전선에서 떼어냈다.
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손가락에 걸린 묵직한 고리를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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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