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제주도에 여행을 떠난이들에게 일어난 환상적인 세가지 이야기
1. 큰 무지개가 뜨는 곳 _ 01
순간 세상에 둘뿐인 기분,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은 마음,
무한한 사랑을 받는
그 느낌이 떠올랐다.
금요일 오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듯 내리는 빗방울은 회색빛 도시를 노랗고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빗방울은 누군가에게 약속을 만들 이유가 되기도 하고, 약속을 미루는 핑계가 되기도 한다.
지수는 남은 일거리를 노트북에 담아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생각하며 퇴근을 했다.
버스 창밖의 도로에는 차가 밀리기 시작했고 유리창에는 빗방울이 톡톡 맺히다 흘러 내렸다.
버스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다행히도 시끄러운 노래가 아닌 나긋나긋한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제주도에 사시는 청취자께서 게시판에 사진을 올려주셨네요. 우와, 엄청 큰 무지개가 바다에 떠있어요.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큰 무지개를 보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연히 이렇게 큰 무지개를 보는 것도 행운이겠네요. 저도 한번쯤은 이렇게 큰 무지개를 보고 싶어요.”
DJ의 멘트가 끝나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Somewhere Over the rainbaw~”
사연에 맞는 노래가 딱 나왔다 싶어 지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제주도를 생각하니 나 팀장이 생각나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나 팀장은 오늘 회사에서 또 지수에게 지수가 작업한 브로셔 디자인이 칙칙해서 마음에 안 든다며 직원들 앞에서 화를 냈다. 그러다가 미안했는지 다시 지수를 불러서 낡은 지갑을 열더니 인심 쓰듯이 쿠폰을 한 장 꺼내어 줬다.
“홍 대리, 이거 전복돌솥밥 2인 세트 무료 식사권이야. 입맛 없을 때 한번 가봐.”
받고 나서 보니 식당이 있는 곳은 제주도였다.
지수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앞에 도착하니, 조용한 집을 지키듯 TV가 크게 켜져 있고 멸치를 넣은 김치찌개의 냄새가 허기를 부채질 했다. 지수의 엄마는 손에 뭍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딸을 맞이했다. 평소보다 엄마의 표정은 한껏 들떠있는 듯 했다.
“너 뉴스 봤니? 제주도 바다에 무지하게 큰 무지개가 떴다는데 내 평생에 그렇게 큰 건 처음 봤다!”
모녀의 대화거리는 뉴스에서부터 시작한다. 심각한 경제 뉴스도 아니고, 한숨 나오는 정치 뉴스도 아닌 주로 특이한 생활 뉴스들이 대화의 시작이다.
어제는 우주여행을 기다리는 재벌들 이야기, 엊그제는 불치병에 걸린 소녀가 나무에서 떨어진 이후에 완쾌된 이야기, 그 전에는 뭐였더라. 아무튼 조금은 발랄하면서 곧 머리에서 잊힐 그런 이야기들이 모녀들의 대화였다. 본인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그런 일들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가 금방 잊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큰 무지개를 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재산이 많아서도, 신의 가호가 내리는 기적도 아닌 일이다. 비 개인 날 수증기량과 햇빛의 방향으로 인해 가끔씩은 볼 수 있는 자연의 현상이니까, 한번은 겪어 봄직한 기대가 되는 일이었다.
“엄마 그렇게 무지개가 보고 싶어요? 우리 내일 주말인데 제주도에 다녀올까요?”
그렇지만 엄마는 지수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듯 했다.
“아휴. 그렇게 갑자기 어떻게 가니? 숙소랑 표는 어떻게 구하고 짐은 언제 싸?”
“좀 그렇지?”
지수가 멋쩍게 웃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떨렸다. 친구 은경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남친이랑 이번 주말에 제주도 가려고 호텔이랑 렌트카까지 예약했는데 갑자기 회사에 감사가 나와서 일하게 됐어. 하루 전이라 환불도 안 되고 날리게 생겼는데 너라도 갈래?’
오늘따라 제주도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싶은 참에 친구의 제안은 또다시 마음을 많이 흔들리게 했다.
제주도에 가게 되면 뉴스에서 본 것처럼 큰 무지개를 반드시 볼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하지만, 우연의 일치처럼 때마침 친구가 예약한 숙소와 렌트카가 있고, 나 팀장이 준 식사권도 있으니 부담 없이 그냥 가고 싶기도 했다.
“엄마 비행기 값만 있으면 돼. 친구가 갑자기 여행을 못 가게 되서 숙소랑 렌트카는 그냥 주겠다고 하는데?”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갑자기 가자니까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비행기 티켓은 어떻게…….”
말끝을 흐리며 엄마는 부엌에 가서 딸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데워 저녁상을 차려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지수는 엄마에게 함께 소화를 시킬 겸 산책을 가자고 했다. 비온 뒤라 날씨가 쌀쌀했다. 옷장을 뒤지던 엄마는 어쩐 일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에게 선물했던 노란색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봄이 올 때마다 즐겨 입던 옷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 번도 입지 않던 옷이다.
카디건을 입고 옷매무새를 만지며 주머니에 손을 넣던 엄마는 무엇인가를 꺼냈다.
“어머나 이게 뭐야?”
신사임당이 웃고 있는 5만 원짜리 한 장이 꼬깃하게 엄마의 손에 있었다.
“비행기 표 값인가?”
지수의 말을 듣고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휴 그래도 비행기 값이 비싸잖니. 둘이 5만원에 갔다 올수 있니?”
그렇게 저렴한 비행기 표가 설마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지수는 스마트폰으로 비행기 표를 조회 했다.
이상하게도 내일, 토요일 아침 10시에 김포에서 제주에 가는 티켓이 2매만 남았고 가격도 9,9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엄마는 흥분하며 말했다.
“돌아올 때는?”
놀랍게도 일요일 오후 7시 제주에서 김포 행 티켓이 14,900원에 딱 두 장이 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태클을 걸었다.
“근데 그거 막 흔들리고 작은 비행기 아니니?”
지수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땅콩항공이야. 엄마”
엄마는 바람같이 방에 달려가 여행 가방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