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글부터 조금 딱딱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게 됐다. 이 글은 연극에서의 사실주의와 서사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들의 논의가 주는 함의를 통해서 오늘날 SNS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글이다. 아마 무척 딱딱한 글이 되겠지만 매우 간략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중세의 '신' 중심 사상이 무너졌다. '신'이라는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인식의 근원으로 삼을 수 없었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로 인해서. 이제 '신'의 자리엔 인간의 '이성'이 놓여지게 됐고, 이성이 모든 인식의 토대가 됐다. 그리고 그 자연의 빛을 단련함으로써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예술에서의 '신고전주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맹점이 존재하는데, '앎'이 '실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합리성'이 실질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신고전주의는 몰락하고, 이성의 대안으로 '감정'이 대두됐다. 즉 감정적으로 순수해졌을 때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능과 감정을 폭발시킬 때 사람들이 순수해지기보다는 오히려 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또한 이상을 성취하지 못했다.
낭만주의의 실패로 인한 대안은 '사실주의'였다. 특히 연극에서의 사실주의는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혁명적이었다. 이전까지는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영웅 같은 사람이 무대 위에 등장했다면, 사실주의의 연극부터는 무대 위에 일상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위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라는 그림은 사실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당시 이 그림을 관람하는 이들은 그림의 인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매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쿠르베는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신과 영웅의 상징을 해석하는 데 길들여져 있던 이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렇듯 사실주의 연극은 무대 위의 우리의 일상적인 사건들 -처럼 보이는 '환영' -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하나의 '현실 폭로'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들은 개인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는 매우 혁명적이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학습 없이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백성의 예술'이었기에 힘이 있었다.
그러나 20C는 반, 비 사실주의적 예술로 가득했다. 이는 곧 사실주에도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또한 그렇기에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반대편에 등장한 사조는 '표현주의'이다. 그러나 '서사주의'가 제시하는 사실주의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 SNS 현상을 분석하는 데 보다 효용성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르툴트 브레히트'가 사실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실주의는 개인이 현실 - 이라고 보이는 환영 -을 직시했을 때 그 힘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베르툴트 브레히트가 보기에, 개인들은 '환영'에 몰입하여 공감하고 웃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적었다. 즉 환영을 통해서 감정을 배설하는데, 동시에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하는 마음까지도 배설한다는 것이다. 웃고 눈물흘리면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자위하는 모습은, 그가 보기에 매우 역겨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극에 있어서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다.
SNS, 그 중에서도 특히 Facebook은 매우 사실주의의 특징이 나타나는 곳이다. Instagram보다 개방된 공간인 Facebook(사회적 문제가 이슈화되는 게시글들이 Facebook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반면, Instagram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통해 볼 때)에는 수천에서 수만까지 '좋아요'가 눌려진,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판하는 글들, 또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을 보도하는 식의 글이 존재한다. 정치, 사회적인 문제가 실제로 우리의 생활 반경에서 일어나는 것들이고, 이것이 미화되지 않은 채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사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모 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는 동성애와 고대 단톡방 성폭력 사건을 두고 여러 논쟁이 이어졌다.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 관점이 옳고 그른가를 논의하기보다는, 몇백 개의 좋아요를 받고 있는 댓글들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동성애 문제와 단톡방 성폭력 사건은 우리 삶의 반경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그 이슈에 관한 글이 무대 위(타임라인 위)로 올라왔을 때,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반응들이 나타난다. 많은 좋아요 수를 볼 때 위의 의견들은 상당한 공감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저 사람들이 동성애 문제를 위해서, 음담패설을 통한 성폭력 문제를 위해서 실질적으로 어떤 노력 하는가? 간혹 저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행동하는 지성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내 논리는 상당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혹시 저들은 저렇게 자신의 의견을 외치고, 그에 대해 상당 수의 공감을 얻는 것으로 '난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자위하고 있진 않을까? 이슈에 대한 분노의 배설 이후 그들이 실제적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추가적인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요새 Facebook에서는 '좋아요'를 많이 받아 인기 있는 페이지를 만들고, 그 계정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정말 웃기거나 혹은 격분하게 하는 글들을 찾아 올린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페이지나 계정은 대나무숲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반려견을 학살하는 이들이 분명히 오늘날 존재한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유기견, 유기묘만 보아도 사람들이 얼마나 반려 동물을 하찮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분노해야 할 태도이다. 그러나 310명의 공감을 얻은 '감정의 배설' 이후에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글의 취지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지기에 저 사람의 글(연극) 또한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다.
"울지 말라. 생각하라."라는 베르툴트 브레히트의 주장을 마지막으로 제시하고 싶다. 그저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적 배설만으로는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다. 사회의 고착화된 피해구조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고, 그 때마다 우리는 동일한 감정적 배설로 일관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좋아요'에 좋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개인주의화되고 경쟁 구도로만 몰아가는 사회 속에서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특히나 기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난 괜찮은 사람이다, 인정받는 사람이다' 하는 자위만으론 본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과한 몰입으로부터 벗어나 생각하는 지성인들의 실천으로 나아갈 때, 우리 사회는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