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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훈 Sep 20. 2020

데이시트, 다들 해봤잖아?

성공일까 실패일까. 


   영국 여행을 간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요즘 SNS와 블로그는 정형화되지 않고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들을 다니는 여행이 주는 매력을 어필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마저도 정형화되지 않는가. '어 저기 예쁘다', '어 저기 새롭다' 싶은 곳들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니까. 어차피 새로운 것, 독특한 것을 찾아다니며 소모될 관심을 갈구할 존재가 아니라면, 내 첫 영국 여행은 보편화된 코스를 밟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 도착해 곧바로 숙소를 찾아 체크인하고, 긴 비행의 피로를 여실히 드러내듯 곧바로 쓰러졌다. 눈을 뜨니 오전 3시. 아, 이게 시차적응의 어려움이구나 싶었다. 이렇게 긴 비행도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긴 시차가 있는 나라도 처음 와봤으니. 피곤함과 걱정보다, 괜히 뿌듯했다. 별 게 다 뿌듯하다. 


   일찍 눈을 떴으니 일찍 움직이자. 어차피 우리에게는 어느 날인가 한 번은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정이 있었으니까. 영국 여행 온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한다는 뮤지컬을 보긴 봐야겠는데, 또 비싼 돈 주고 보기는 아까웠으니 데이시트를 활용해볼 생각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시도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왕 이렇게 일찍 눈 뜨게 된 거 오늘 곧바로 해보자. 


   데이시트는 예약되지 않는, 잔여 표를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좋은 자리는 없다. 맨 앞자리가 주 대상이라는데, 관람 전까지 왜 맨 앞자리가 그렇게 비인기좌석인지 모르고 좋아라 했다. 관람 후 뻐근한 목을 붙잡았을 때에야 알았지, 그렇게 목이 아픈 자리라는 것을. 표는 10시에 발권되기 시작하는데, 그 자리라도 싸게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이르면 7시부터 줄을 서기도 한단다. 한정된 표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우리 부부는 7시에 출발해 7시 30분에 Lyceum Theatre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니 box office에는 한국인 한 명만 서 있었다. 분명 검색할 때는 7시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서기 시작한다 했는데. 역시 성실한 한국인들. 성실한 한국인이 해보고 쓴 글일 테니, 덕분에 우리도 성실하게 움직이게 됐다. 



   유독 비가 많이 왔다. 비가 많이 오는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첫 날 새벽부터 이렇게 비가 오고 춥다니. '내가 알던 영국에 왔더니 진짜 그렇네!'라는 생각에 즐거워해야 할지, '화창해야 여행 다니기 좋은데'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물론 다음 날부터 후자의 감정으로 일관하게 됐지만. 



   추운 날씨,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팁이 있냐고? 팁이 어딨겠나, 그저 기다리는 건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아내를 세워두고 길 건너에 있는 카페에 가 커피를 사왔다. 커피 한 잔 달라는 그 말조차 왜 이렇게 소통하기가 힘든 건지. 날이 추운데 옆에 서 있는 한국 청년은 일행도 없어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분 커피 한 잔을 더 사왔다. 커피 한 잔 나눠마시며 한국에서 흔히 벌어지는 호구조사를 서로 나누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작 호구조사 중 이름을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게 웃프다. 





   9시쯤 됐을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뒤로 줄을 서 있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와 "일찍 가세요!"라고 말할 감흥이 없는 것이지, 8시반 정도만 돼도 슬슬 사람들이 줄을 이어가기 때문에 꼭 데이시트로 뮤지컬을 봐야 한다면 부지런하게 움직이시라. 10시 종이 딱 쳤을 때, 우리는 순탄하게 들어가 원하던 표를 구매하고 나왔다. 




   분명 10시는 이른 시간인데, 3시에 눈 뜬 우리에게는 기상한 지 7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날 아주 많은 일정을 거치고 저녁 8시?쯤 뮤지컬을 봤으니, 나의 상태가 어땠겠는가. "아~ 그랬냐~ 발바리 치와와"부분을 듣고 엄청난 감격을 느낀 것 말고는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내가 이 뮤지컬을 봤구나 싶을 뿐. 관람 후 나오며 뻐근한 목을 열심히 주물렀다. 보느라 고개를 빳빳이 드느라 목이 아픈 건지 계속 조느라 목이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데이시트는 성공했지만, 제대로 된 관람은 실패했던 날. 그래도 남들 다 하는 보편적인 여행 일정의 하나를 완료했다는 점에서 느끼는 뿌듯함이 생각보다 컸다. 비록 보편적이고 남들 다 하는 일정이지만, 내가 세워 아내와 함께 실행했다는 점에서 느끼는 뿌듯함은 또 우리만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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