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타인은 나에게 영원한 미지이자 지옥입니다
솔라리스(스타니스와프 렘, 1961)
바야흐로 대(大) 소통의 시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내 말을 들어 줄 사람,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을 찾아 끝없이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많은 SNS 친구들과 그 많은 카톡 친구들을 놓아 두고도 '소통'이란 것을 찾아 아직도 헤매고 있다면 이건 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솔라리스>는 '솔라리스'라는 미지의 행성을 탐구하기 위해 애쓰는, 그러면서 의도치 않게 그간 숨겨 왔던 자신의 내면과도 직면하고야 마는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과는 말 그대로 참담할 뿐이다. 온갖 과학적 접근들은 솔라리스가 도대체 어떤 행성인지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해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쓰인 난해한 책들만 잔뜩 모아 놓은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책표지 색깔이나 들여다보는 것뿐인데도 말야."
실제로 솔라리스를 조사한 과거 학자들의 연구 일지가 빼곡한 내용으로 적혀 있지만 독자는 당연히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그 내용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노력을 다했음에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게 결론이기 때문이다.(이래서 문학을 읽으면서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하는 질문이 세상 바보 같은 것이다.)
이런 지난한 과정 끝에 작가는 결국 솔라리스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듯 하다. 주인공(크리스 캘빈)은 솔라리스의 산출물인 하레이와 공존하는 것에 결국 실패하고 심지어 '그녀'를 파괴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캘빈은 솔라리스를 떠나는 동료(스나우트)와는 달리 잔류하는 쪽을 택한다. 그 동안의 실패에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는 솔라리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조차도 품지 않고, 자신이 그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할 뿐임을 그저 인정할 뿐이다.
나는 지금껏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인류로 하여금 미약한 소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헛수고를 거듭하게 만들고, 무심결에 나를 티끌보다 가볍게 들어올리는 이 액체 상태의 거인이 나와 그녀, 두 사람의 비극에 마음을 움직이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지 상태의 인정이 솔라리스로 대변되는 미지의 세계에만 머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저 바깥에 놓여 있는 거시세계만큼이나 미시적인 내면에 대해서도 우리가 여전히 무지함을 꾸준하게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캘빈은 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솔라리스에 의한 그림자인만큼 완전한 타인은 아니지만) 하레이와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데에 실패한다.
더 나아가 내가 타인에게 전적으로 무지하다면, 조금 더 축소해 볼 때 나 자신에 대해서는 과연 무언가를 알고는 있는지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세계, 타인, 심지어 나에 대해서도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할 뿐이다.완전히 부정할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경험상 무언가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미치는 해악은 너무나도 크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두운 구석이나 미로, 막다른 골목, 깊은 우물, 그리고 굳게 닫힌 시커먼 문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세계, 다른 문명과 접촉하기 위해 머나먼 행성까지 진출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런 결론이 그저 비관과 염세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솔라리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도 그러할지라도 캘빈(나)와 솔라리스(타인 또는 거시세계) 사이의 조심스러운 접촉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끝없이 실패했고 끝없이 실패할 것이지만, 또 미지와 끝없이 조우하리라는 희망 아닌 희망 아니겠는가.
아래는 캘빈이 묘사한 솔라리스의 모습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하는 행동과 유사하지 않은가. 결국 솔라리스도 캘빈 등 과학자들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단지 인간이 솔라리스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을 뿐.
바다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형체와 맞닥뜨리게 되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정신없이 빠르게 그리고 충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법칙이 정해 놓은 경계를 넘어서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도중에 즉시 물러선다.
알베르 카뮈는 세상과 나 사이의 대립을 '부조리'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방식을 각각 희망, 도피, 반항으로 규정했다. 캘빈은 말할 것도 없이 '반항'에 해당한다. 반항이란 곧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는 캘빈이 솔라리스에 머물기로 결심하면서도 앞으로도 솔라리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예컨대 스나우트와 같이 솔라리스를 떠나 버리는 것은 나와 세상 간 대립항에서 후자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므로 문제 자체를 슬그머니 은폐해 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노력을 요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 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일이다.
위는 <시지프 신화>에서 반항에 대한 표현 중 일부인데 캘빈이 머나먼 미지의 행성에 남아 바다와 끝없이 직면하는 모습과 소름끼치게 일치하지 않는가. 따라서 내가 나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면하는 방식은 마치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시지프와 같을 것이다. 이는 곧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며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나면 <솔라리스>는 오히려 따뜻한 위로를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평생 내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겠지만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들과 직면하는 당당한 '시지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