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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ul 31. 2019

예수에 대하여


1.

군대 있을 때에, 본업은 행정병이었고 부업으로 주말마다 군종병 패거리에 끼어 놀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즐거운 추억이었다. 대민지원도 그렇고 각종 축일 행사 준비도 그렇고. 제대하고 나선 단 한번도 성당에 간 적 없지만.

19개월정도 군종병 노릇을 하면서 얻은 것은 하느님 따위는 없다는 것과 예수라는 인간의 대단함이다.

종교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 비록 나이롱 신자이긴 하나 아직 파이지는 않았으니까 나도 천주교 신자이긴 하고, 신부님이나 수녀님, 교황을 존경하고 주위 형제자매들에게도 애정이 있지만 하느님 같은 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존재했다. 인간 예수는 한때 이 땅을 걸었고, 이는 학문적으로나 문헌 기록에 비춰 보나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심지어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의 거두조차 못박아 짚고 넘어가는 사실이다).

예수가 <나자렛의 몽키스패너>라는 별명을 가진 조폭 두목이었다고 하는 설도, 브라이언이라는 운이 더럽게 없는 동네 백수 옆집에 살던 이웃이라고 하는 설도 있긴 한데 둘 다 정설은 아니고, 그나마 확실히 밝혀진 것만 보자면

'나자렛이라는 깡촌에서 목수 아들로 태어나 따라서 목수 짓 하다가 서른 즈음에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동네 건달들 모아다가 유랑하면서 설교를 하며 다니다가 정부에 찍혀 내란선동죄로 사형당했다' 정도가 다다.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이 아닐 수가 없다.

2.

예수 하면 수염이 덥수룩하고 피부가 그을린 건장한 아저씨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서른 전까지 노가다를 뛰었으니 실전근육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고, 사막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도(심지어 단식과 같은 고행까지 했는데도) 쓰러지지 않은 걸 보면 기초체력도 대단했을 것이다. 거기다 혼인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꾼 것을 보니 술도 꽤나 마셨을 테고, 성전에서 상인들을 채찍 들고 줘팬것을 보면 성깔도 한 성깔 했으리라.

삼국지 식으로 하면 난세의 영웅이라, 최소한 동네 멋진 형은 되었으리라.

근데 아니다. 예수는 군웅할거나 황건적이나 지방 호족으로 이름을 날리는 대신 건달패를(건달패라도 보통 건달패가 아니다. 베드로를 보라. 수틀리면 바로 칼을 꺼내서 멀쩡한 종놈 귀때기를 잘라내는 아주 못되먹은 놈이다.) 거느리곤 -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래, 기실 예수가 별 대단한 말을 한 게 아니다. 너희 서로 사랑하라. 좀 더 길게 풀어 말하면, 제발 고만 좀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라, 이게 다다. 뒤에 올 인간들이 개 지랄 난리 발광을 바가지로 떨어 대서 문제지. 뭐가 어렵냐. 장애인이건 문둥이건 게이건 뭔 나발이건 다 같은 인간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제발 고만 좀 싸우라고. 뭐가 어렵냔 말이다. 대체.

3.

예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늘로 가버렸을까. 나는 예수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 서울역 앞에 담배나 동전을 구걸하는 이들 사이에 예수가 있으리라고 나는 믿어서 볼 때마다 달라는 것을 준다. 아마 아니겠지, 그곳보다 돌봐야 할 곳은 많이 있을 거니까.

예수가, 만약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아들(이자 신 그 자체)라는 사실을 내가 믿게 된다면, 이기적이게도 나한테만 와 줬어도 좋겠다.

나는 예수가 좋다. 그가 인간이었기에 좋다. 칫솔도 치약도 전동 킥보드도 없는, 불편하기에 그지없는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그는 견뎌냈음은 물론이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그 정도까지 해낼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고, 또 신의 아들이면 온전히 전지전능은 아니더라도 80퍼센트 정도는, 양보해서 50퍼센트 정도는 전지전능했으니까 바쁘신 와중에 나에게도 와 줬으면 좋겠다. 와서, 그의 인간으로써의 고뇌와 고민을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야, 씨발, 별거아냐, 나라고 모르겠냐, 심지어 신의 아들인 나도 그 고생 하고 속 썩였는데, 니도 할 수 있어, 인간관계가 아무리 지랄맞더라도 널 사형이라도 시키겠냐. 근데 형은 아빠 가업 물려받았잖아. 취직 걱정은 없잖아. 좆까, 이 새끼야, 니가 나 대신 할래?

세상 모든 인간의 죄악을 대신 짊어질 자신도 재주도 없다.

아니.
그래, 이놈아. 할 수 있어.
그럴까? 형도 고민했어?
그럼. 단식도 하고, 아버지, 어디로 가시나이까, 탄원도 하고.

예수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4.

예수가 오면 세계평화부터 이뤘으면 좋겠다. 시간이 남으면 나랑 술도 마셔 줬으면.

나는 예수가 좋다. 그가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좋다. 번뇌하고 괴로워했기에 좋다. 자기에게 버거운 사명을 짊어지며, 내게 합당한 - 혹은 지나친 - 짐일까, 끊임없이 생각해서 좋다. 그럼에도 그것을 끝까지, 그래, 끝까지, 자신의 죽음까지, 짊어졌기에 나는 그를 존경한다. 또한 닮고 싶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내 죄도 짊어져서 좋고, 내가 괴로울 때면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예수라는 위대한 인간이 살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어떤 존재의 가르침을 평생 설파하며 살다 죽었다. 많은 인간을 죽였지만 그보다 많은 인간을 살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구호는, 이데올로기는, 표어는 간단해야 한다.
너희 서로 사랑하라.

죄악을 그가 짊어졌지만, 죄악은 아직 우리에게 있다.

5.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작가 - 로맹 가리, 니코스 카잔차키스 - 중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란 소설이 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일보직전에 악마(혹은 신)이 와서, 네 인생을 통채로 되돌리겠느냐고 묻는다. 예, 저는 돌아가 아내를 맞고 자식을 보고 번성하며 평범하고 충족한 삶을 살겠습니다, 그는 답한다. 눈을 떠 보니, 그런 삶이 이루어져 있다. 자식이 커 손자를 보고, 곡물은 씨앗을 맺고 과실나무는 열매를 이룬다. 아, 다 이루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행복하고 충만한 삶인가, 하고 예수는 자문한다. 눈을 뜬다, 다시 그 언덕이다, 눈앞에는 십자가가, 옆에는 창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찌를 도둑과 그 피를 받아 성배를 만들 군인이 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삶이다. 그렇게 예수는 죽음을 맞는다.

5.

예수는 또, 소설이 막히면 등장시키기에도 좋다. 어떻게든 글이 막히면 예수가 나오면 어떻게든 풀리게 된다. 그래야지, 그럼.

6.

삶은 쉽지 않다. 뭘 해먹고 사나,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따위를 고민할 때, 한때 저 중동에 예수란 인간이 살았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단 것을 생각하면 대충 기분이 나아지고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내게 종교란 이런 것이다.



나자렛의 몽키스패너는 검색하면 나온다.

브라이언 운운은 영국의 전설적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썬의 <브라이언의 삶과 죽음>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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