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인마트에서 일할 때 자주 오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는 평일 점심 시간마다 마트에 들러 점심 식사로 먹을 만한 것들을 사갔다. 마트에서는 삼각김밥이나 도시락과 같은 음식도 만들어 팔기 때문에 근처의 직장인들이 종종 점심에 와서 구매했다. 마트에 자주 오던 그 소녀도 항상 비슷한 시간에 와서 삼각김밥과 음료수, 혹은 군만두와 음료수를 사갔다. 식사로 때우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늘 지친 기색으로 마트에 들어와 카페테리아로 가서 삼각김밥을 살지, 군만두를 살지 한참을 고민하고 하나를 고른 뒤 냉장고 앞에 와서 어떤 음료수를 살지 다시 한참을 고민하고 하나를 골랐다. 늘 말이 없고 피곤해 보이는 그에게 인사를 하면 그는 집중해서 들어야 겨우 들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가끔 내가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해서 당황할 땐 목례를 하기도 했다. 종종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를 만나기도 했는데 역시나 기운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인사를 건넸는데 ‘이 새끼는 뭔데 나한테 인사하지?’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뒤로는 지하철에서 만나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는 늘 혼자였다. 마트에 들러 음식을 살 때도, 등교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늘 혼자였다. 파리에서 사는 동안 혼자 등교하는 학생은 자주 봤지만 혼자 점심을 먹는 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그를 제외하곤 혼자 점심 식사를 하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유별나게 기억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그를 아냐고 물었는데 다들 직접 봐야 알겠다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만큼 눈에 띄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기운 없어 보이며 혼자 음식을 사가는 그가 괴롭힘을 당하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기운 없이 다니는 학생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기운 없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계산하러 오면 괜히 말을 걸곤 했는데 늘 시큰둥했다. 그냥 소심한 사람이구나 싶기도 했다. 괜히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잔뜩 구겨진 지폐도 신경 쓰였다.
어쩌면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인이라면 모두가 흥이 넘치고, 여유롭고 밝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사람이 80억명 있다면 80억 가지의 사람이 존재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하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게 부끄럽고 창피하다. 물론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수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 창피하다. 왜 나는 ‘니하오’, ‘씨에씨에’ 따위의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 하면서 프랑스인은 다 같을 거라고 단정 지었을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좋은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날이 무색해진다. 한 발 나아가 생각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갇힌 생각을 한다면 나아갈 수 없다. 현재와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에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쩌면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는 나를 그 소녀는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왔을 뿐인데 걱정하니 말이다.
지난 파리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다 아직도 어른은 커녕 좋은 사람도 되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던 모든 날이 부정 당하는 것 같다. 역시나 세상에 쉬운 건 하나도 없다. 언젠가는 세상에 쉬운 게 하나 쯤은 있는 세상을 보고 싶다. 무표정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항상 무표정을 짓던 그 소녀가 다르게 보이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