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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Dec 23. 2019

거짓말도 복수도 베티처럼

굿라이어 (2019)



‘술을 마십니까?’ 

‘아니오.’ 


클릭하는 여자의 손에는 방금까지 와인 잔이 쥐어져 있었다. 


‘흡연을 합니까?’ 

‘아니오.’ 


클릭하는 남자의 손 역시 담배를 쥐고 있다.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 프로필을 올리면서 완전히 솔직한 사람은 드물 테니까 이 정도면 보정된 사진을 올리는 것보다 정직하다고 할 수 있겠다.ᅠ[굿라이어]라는 제목은 이 귀여운 거짓말쟁이들에게 퍽 어울려 보인다.


몇 년 전 남편을 잃은 베티(헬렌 미렌)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로이(이언 매캘런)를 만난다. 첫 만남에서 서로의 사소한 거짓말을 털어놓고, 가까워진 이들은 잘 어울린다. 


다정하고 천진한 베티와 유머러스한 신사 로이는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면서 호감을 쌓아간다. 두 사람의 멋진 은발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년의 그레이 로맨스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다.ᅠ



죽은 아내를 향한 순애보가 남아있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로이는 사실 사기꾼이다. 80이 넘은 지금까지 줄곧 타인을 등쳐먹으며 부를 축적한 그는 지금도 투자 사기를 계획하고 있다. 사기 행각을 벌이는 와중에도 틈틈이 베티와 데이트를 하는 이유 역시 다름 아닌 돈이다. 바로 베티가 죽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유산을 가로채는 것. 


온갖 사기와 협잡을 일삼아온 포식자 앞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베티는 영락없는 희생양이다. 무릎이 아픈 로이에게 기꺼이 방을 내어주고, 허황된 투자 계획에도 금세 동의한다.ᅠ로이는 손쉬운 사냥감에게서 빼앗을 노획물에 하루하루가 설렌다.


그러나 베티는 로이가 가장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칼을 꺼낸다. 아주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 온 칼은 그를 베어버리기에 충분히 날카롭다. 두 사람이 만나고 로이가 베티를 사냥감으로 인식한 것은 사실 다 베티가 만들어 놓은 무대였다. 로이가 오래 전에 저지른 범죄는 베티의 전 생에 걸쳐 잊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는 원한을 품어 삭혀버리기보다 정성껏 복수하기를 선택했다. 



아쉽게도ᅠ영화가 공들인 비밀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무기인 복수는 초반부터 빠르게 감지된다. 이들의 첫 데이트 영화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며 베티의 손자는 나치가 기승을 부렸던 시기의 독일 역사를 공부한다.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 중 하나가 로이에 의해 베티를 파괴했고, 그것을 단죄하러 베티가 로이를 다시 찾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복수극의 연출 역시 오랜 원한에 비해 평범한 편이다. 그러나 두 배우는 스릴러의ᅠ헐거운 부분을 조이고, 구멍난 곳을 감쪽같이 메운다. 추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악인의 내면을 주름과 근육의 상호작용으로 피부에 띄어올린 솜씨는ᅠ영국 여왕에게서 ‘경’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악인이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고 어쩐지 안쓰럽기까지 한 캐릭터의 긍정적인 부분은 오롯이 이언 매캘런이 연기해온 세월에서 나온다.



특히 헬렌 미렌은 아이처럼 순진해 보이는 노인부터 복수를 위해 한없이 냉정한 집행자까지 영화의 가장 다채로운 즐거움이 되어 활약한다. 그가 과거의 상처와 대면할 때는 베티의 아픔과 한이 스크린을 뚫고 보는 이를 덮쳐올 정도다. 


무엇보다 단죄를 끝마치고 본인의 세계로 돌아와 티 하나 없이 활짝 웃는 베티의 얼굴은 참 후련하다. 속 시원한 웃음소리까지 들리는 듯한데, 그 웃음은ᅠ그간 영화에서 너무 많이 죽어야만 했던 여성들에 대한 진혼곡처럼 들린다. 


싸이코패스에게, 연쇄살인범에게, 연인에게 혹은 전쟁에서 강간당하고 맞고 결국에는 죽어서 퇴장한 여자들. 그들은 간신히 얻은 단죄의 기회조차도 복수가 주는 허무함에 시달려야 했다. 악당의 목을 베고 속 시원히 웃는 것은 영화에서 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ᅠ베티는 복수를 준비하고 행하는 이들이 흔히 마주치는 수렁에 빠지지 않는다. 이 복수로 인해 결코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고, 그로 인해 허무함만을 안게 될 것이라는 이정표를 가뿐하게 지나친다.ᅠ


그동안 희생자들은 너무 많이 봤다.ᅠ이젠 복수의 굴레에 빠져서 허망함에 괴로워하기보다는 죄인을 처절하게 단죄하고, 조금이라도 후련해하는 여자들의 얼굴을 더 보고 싶다. [굿라이어]의 베티처럼.



이지혜 /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영화 속의 멋진 여성 캐릭터와 그보다 더 멋진 주위의 여성들에게서 힘을 얻습니다.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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