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스 플랜 (2015)
연말이 되면 평소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연말’을 핑계로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들과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왠지 올 한해 제대로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머쓱해지기 마련이다.
한바탕 올 해에 대해 푸념을 하고 난 뒤엔 나는 내년 계획을 물어보곤 한다. 올 한 해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내년이라도 괜찮으면 되니까.
그나마 내년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데, 누가 되물었다.
새해 계획이
꼭 있어야 돼?
이 말을 듣곤 생각에 잠겼다.
새해 계획을
세우는 타입과
안 세우는 타입이
있을 수 있겠군
영화 <매기스 플랜>의 주인공 매기는, 당연히 새해 계획을 세우는 타입이다. 아니, 꼭 새해가 아니어도 항상 삶에 대해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영화 제목조차 <Maggie’s plan>
매기야 너는 역시 다 계획이 있구나...
매기는 아이는 갖고 싶지만 결혼엔 크게 관심 없는 여성이다. 그래서 세운 첫 번째 계획. 결혼 없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지는 것.
그래서 고른 남성은 피클 사업을 하고 있는 일명 ‘피클맨’이다. 친절한 피클맨의 도움을 받아 신체적 접촉 없이 임신에 성공하려는 찰나, 매기는 인류학자 존과 사랑에 빠진다.
존은 지적이고 그럴 듯 해 보이는 남자지만 아이가 둘이 있고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다. 책을 써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존에게 부인인 조젯은 부러우면서도 챙겨주고 싶은 존재다.
조젯은 자신의 커리어 때문에 육아나 가사에 소홀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존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결국 존은 ‘고약한’ 자신의 아내와 달리 다정하고 자신의 일을 응원해주는 매기를 택한다.
그리하여 매기의 첫 번째 계획은, 조금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매기는 이혼한 존과 결혼을 해서 딸을 낳게 됐는데 -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게 됐다. 그리고 몇 년 뒤 매기는 다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존을 다시 조젯에게 돌려보내는 것.
존과 결혼한 매기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존은 책을 쓴다는 핑계로 육아와 가사를 돌보지 않고 매기는 존의 아이 2명과 새로 낳은 딸까지 세 명의 아이를 케어하면서 자신의 일까지 꾸려가고 있다. 게다가 존은 이혼 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조젯의 고민을 상담해주느라 매기와의 새로운 생활은 뒷전이다.
다시 존을 돌려보내기로 한 매기는 존의 전부인인 조젯을 찾아가고, 조젯도 매기의 계획을 돕기로 한다.
이쯤 되면 매기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저렇게 허무맹랑한 계획을 짜는 건가 싶을 수 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매기에게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매기가 짜는 계획들이 실현가능성이 낮아 보이긴 하지만 목표가 명확하고 이유도 납득이 된다. 매기의 계획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피해를 주지도 않고 지금보다 자신이 더 행복해지기 위한 적극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매기의 두 번째 계획도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지만... 매기는 수학을 잘하는 피클맨이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는다. 피클맨은 이렇게 답한다.
“누구든 수학의 옷깃만 스쳐도 수학이 아름답다고 느낄거야. 난 옷깃으로 충분했어. 그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 전체를 볼 방법이 없으니까. 늘 전체의 일부분만 어렴풋이 볼 뿐이지”
삶도 수학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면, 전체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애초에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위 ‘빅픽처’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계획대로 안 되는 삶이라면, 좌절감을 맛보지 않도록 계획 따위 없이 그냥 지내도 좋을 순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계획의 일부만이라도 이뤄져도, 그래도 또 좋은 거 아닐까. 매기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삶은 변했다. 자신의 삶의 결과와 그 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납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나는 새해 계획을 세우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한해를 돌아봤을 때 미안할 일, 한심스러운 일, 그리고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불행들을 곱씹으며 계획을 세울 의지들이 계속 꺾여왔다.
‘지금 하루하루 살기도 버거운데 내년 계획까지 세워야 하다니! 되는대로 살아가는 거지 뭘.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거잖아’
계획을 세우면 조금이나마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겨서 그걸 피해왔다. 하지만 이번 새해에는 오랜만에 계획을 세워보려 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참 열심히 사는 매기를 보니, 나도 이번에는 한 번 더 그래봐야 할 것 같다.
계획의 틀어짐 속에서 생각지 못한 삶의 즐거움이 생기기도 하는 거니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한번 믿어보려 한다.
매기스 플랜,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게 일 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 이혜성입니다'를 연출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