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타귀 (1980)
요즘 아이들의 히어로가 <어벤져스>라면, 내가 어렸을 때는 이소룡이었다. <정무문>이나 <사망유희>를 본 아이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아뵤오!” 괴성을 지르며 쌍절곤을 휘둘렀다. 이소룡의 뒤를 이어 인기를 끈 영화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귀신이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아이들은 부적이라고 종이를 이마에 붙이고 두 팔을 들고 콩콩 뛰어다녔다. 1981년 홍금보 주연의 <귀타귀>가 극장 개봉했을 때 일이다.
<귀타귀>의 주인공, 장대담(홍금보 분)은 대담하기로 동네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담력 내기를 제안한다. 외딴 산 속, 관 속에 있는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면 거금을 주겠다고. 장대담의 아내와 바람이 난 마을 부자가 꾸민 흉계다. 부자에게 돈을 받은 사악한 도사가 장대담을 해치우기 위해 시체에 주술을 건다. 이제 장대담과 강시의 한 판 대결이 펼쳐진다.
1980년에 제작된 영화라 지금 보면 유치한 장면도 꽤 있다. 권격물에 호러를 더했는데, 영화의 진짜 매력은 코미디다. 80년대 홍콩 액션 코믹 호러라니, 취향에 맞을지 불안하다면, <왓챠플레이>에서 이 영화를 재생하고 시작 후 45분 00초부터 딱 2분 30초만 보시라.
도사의 주술로 시체가 콩콩거리며 장대담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와 비슷한 또래라면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본 장면을 휴대폰으로 만나는 흥분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확행!)
새해가 되면 결심을 한다. 운동을 해야지. 학원을 다녀야지. 공부를 해야지. 그런데 오래 가지 않는다. 인스타에 올라온 몸짱의 사진을 보며 의욕이 불끈 솟는다. ‘그래, 나도 올해는 초콜릿 복근을 만들 거야!’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영어 학원을 등록한다. ‘그래, 나도 이제는 자유 여행을 가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놀 거야!’ 문제는 꾸준한 실천이다. 마음먹기는 쉽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영화 <어벤져스>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내 손에서 거미줄이 나오거나, 손을 뻗으면 망치가 날아오거나, 아이언맨 슈트가 몸을 감싸는 건 아니다. 그 현란한 액션이 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눈속임이란 걸 안다. 자극은 강해졌지만 감흥이 적다. ‘아, 또 돈으로 갖다 발랐네.’ 요즘 영화를 보면 실사 영화인지 애니메이션인지 구분이 안 간다. 영화를 보고 기껏 할 수 있는 건, 코스튬을 사거나, 피겨를 모으거나, 게임을 다운 받거나, 돈으로 지르는 일이다.
1980년대 홍콩 영화는 돈으로 때우는 대신, 몸으로 때웠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 영화의 모든 액션은 배우들이 직접 몸으로 만들어냈다. <귀타귀>같은 영화를 보면 자극이 왔다. 나도 연습만 하면 직접 할 수 있을 것 같다. 몸을 굴리고 싶어졌다.
이제 재생시간 1시간 16분 30초 지점으로 가자. 부자의 모함에 빠져 살인 누명을 쓴 장대담이 포졸들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4명의 포졸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데 홍금보는 고작 식탁 의자를 들고 싸운다. 무술인지 서커스인지 구분이 안 간다. 3분간의 러닝 타임 동안 아크로바틱 액션의 진수가 나온다.
영화를 보며 숙연해졌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사람이 저토록 날렵하게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단련을 했을까. 서로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나도 다치는 상황이니 끝없이 합을 맞추고 연습을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나도 더 성실하게 살아야겠노라 다짐한다.
나이 50이 넘어가니 하루하루 나약해진다. 체력이 줄고 운동감각이 퇴화하는 걸 온 몸으로 느낀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초라해진다. SNS에 매일 올라오는 사진과 영상을 보면 주눅이 든다. 얼짱 몸짱에 심지어 감각까지 끝내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으로 대리만족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이제 나도 몸을 써야겠다.
각본/감독/주연 1인3역을 한 홍금보는 <귀타귀>로 명성을 얻었다. 강시 역할을 한 무술 연기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시체 분장을 한 터라 얼굴을 알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최선을 다해 콩콩 뛰어다니고, 몽둥이를 맞고 자빠지고도 벌떡 일어나 손을 내뻗는다. 그 성실한 연기에 나도 각오를 다진다. 그래, 저게 인생이다. 이름 없이 사라져갈 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
새해 결심이 약해질 때마다, <귀타귀>를 틀고 45분 지점을 볼 것이다. 강시와 홍금보의 혼신을 다한 격투씬을 보며 각오를 굳게 다질 것이다.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 오늘 나는 강시에게 배운다.
귀타귀, 지금 보러 갈까요?
김민식 / MBC 드라마 PD
MBC 드라마 PD입니다. <뉴논스톱>, <이별이 떠났다>,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했어요.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매일 아침 써봤니>,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도 집필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