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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Feb 12. 2020

공평한 사랑의 격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놀랍게도 격조 있고 비통하지만 아름다운 멜로드라마 한 편이 도착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네 번째 장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으로 감독은 이 영화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받았다. 


국내에서 셀린 시아마의 영화가 개봉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미 셀린 시아마는 전 세계 영화인들이 주목하는 주요 영화제의 수상자 명단과 후보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비평가와 관객들의 두터운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데뷔작 <워터 릴리즈>(2007)부터 소녀들의 성 정체성을 전면으로 다뤘으며 남자가 되고 싶은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톰보이>(2011)를 거쳐 10대 흑인 소녀들의 정체성을 주목한 <걸후드>(2014)까지.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관심사를 확고히 벼리면서 그 세계를 섬세하게 다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이르러 셀린 시아마는 사랑의 역학을 탐구하고 그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여인들을 통해 예술적 도약에 이른다.



18세기 프랑스 브르타뉴의 섬마을. 당시로써는 전면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던 여성 직업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는 백작의 딸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초상화 그리기를 의뢰받는다. 완성된 초상화는 엘로이즈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밀라노의 정혼자에게 보내질 예정이고 그럼 곧 결혼이 진행될 것이다. 


마리안느가 오기 전부터 엘로이즈는 초상화 그리기를 거부해왔다. 정해진 운명을 향한 그녀 나름의 저항이었다. 한편 마리안느는 자신은 결혼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선택지를 가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낯선 세계 그 자체이자 신선한 각성이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초상화 그리기를 통해 서로를 관찰하며 사랑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을 끌어안는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초상화 그리기에 있어 화가와 모델 간의 시선의 위계를 두지 않기. 사랑과 예술, 둘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되는 방식을 단호히 거부하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독보적인 여성 퀴어 멜로극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이 영화의 요체다. 두 사람의 사랑은 평등한 힘의 역학 속에서 진척되며 사랑의 진행이 곧 초상화가 완성되는 과정이다. 


초상화 그리기라는 예술 작업은 누구 하나의 일방적인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게 아니며 오직 두 사람의 공동 창작으로만 가능하다. 심지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와 허물없는 친구처럼 지내는데 영화는 여기에 관해서 특별한 설명의 말을 덧붙이지 않으며 그런 게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셀린 시아마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절대다수의 여성 인물들로 영화를 꾸렸고, 영화의 모든 시간을 여성들의 사랑과 유희에 쏟아부었다. 여성들의 공동의 목소리와 개별 여성의 이야기가 충돌 없이 층층이 쌓여나가고 마침내 커다란 울림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다. 


경쾌하면서 동시에 웅장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사랑과 예술의 격랑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맡겨도 좋을 것이다.



정지혜 / 영화평론가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제11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전문위원, 영화 웹진 <REVERSE>의 필진이기도 합니다. 『너와 극장에서』(공저, 2018), 『아가씨 아카입』(공저 및 책임 기획, 2017), 『독립영화 나의 스타』(공저, 2016) 등에 참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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