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흔들리는 지금 필요한 것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2013)
코로나 시대에 열정은 어디로 흐르는가. 이 강력한 팬데믹은 기업에게는 재택 근무를, 시민에게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최신 덕목으로 요구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그간 과로에 익숙해진 육체가 남긴 에너지를 해소하기 위해 갖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다.
400번을 저어야 먹을 수 있는 ‘달고나 커피’나 강원도 감자 소비 촉진을 위해 사이트를 열었다가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 일명 ‘포켓팅’까지. 전염병의 공포와 불안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은 계속된다.ﾠ
집 안에 고이고 고인 나의 의욕 역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을 하게 만들었다. 50회짜리 중국 드라마를 이틀 만에 독파시키고, 중국어 방문학습까지 신청하는 기민함은 지난 달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다. 미루고 미루던 대청소를 비롯해 각종 집안일을 해치우는 것은 물론 급기야 밀가루와 버터로 루를 내어 양송이 스프를 끓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냄비 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멍하니 스프를 젓다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에서 매일 아침 샌드위치와 스프를 만드는 아키코(고바야시 사토미)도 이런 마음으로 냄비를 저었을까?
아키코의 하루는 단순하다. 아침부터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 장사를 마치고 나면 가게를 정리하고 주로 고양이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해가 지면 조촐하게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마치 날 때부터 샌드위치 가게를 했을 것 같은 여유를 몸에 두르고, 늘 이렇게 살아왔을 것 같지만 그도 이러한 일과를 갖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베테랑 편집자로 책을 만들며 사무실에서 마감을 하던 아키코는 식당을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가게를 이어받는다. 우연히 집으로 들이게 된 고양이조차 이제 막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실은 스스로도 신기한 기분이 들 정도로 낯선 생활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비로소 혼자가 되어 1일분의 삶을 짓게 된 아키코의 세계에서 식당은 중심이 된다.ﾠ화려하지 않지만 길 가는 이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단정한 샌드위치 집에는 이윽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해온 이웃들이ﾠ“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때로는 혼자이고 싶은” 아키코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온다.ﾠ가게 앞에 핀 독이 든 앵초에까지 훈수를 둘 정도로 깐깐한 찻집 마마(모타이 마사코)는 모르는 척 일손을 빌려주고, 늘 조용한 스다 씨(시오미 산세이)는 아키코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해 넌지시 말해준다. 사려 깊은 아르바이트생ﾠ시마(카나)와는ﾠ일을 마치고 마시는 맥주 한 잔의 각별함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ﾠ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서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또 그게 어떤 계기가 되어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키코의 담당 작가가 했던 말은 그대로 아키코에게 돌아온다.ﾠ태어난 곳에서 떠나지 않고 줄곧 지내온 과거를 후회했던 아키코는 너무 가까이 있어 자세히 보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함께 하면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 어머니를 추억하고,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가게의 앞날을 이야기한다.ﾠ
별 것 없지만 충만한 일상.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나누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 그렇게 모인 보통 날들이 나의 세계가 되고, 나를 지탱한다.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 친구들을 만나는 일상처럼 큰 문제없이 지속되리라 믿었던 평범한 것들이ﾠ위협받는 지금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밖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염려되는 요즘이라면ﾠ’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이 꽤 괜찮은 옆자리 메이트가 되어 줄 것이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지금 볼까요?
이지혜 /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영화 속의 멋진 여성 캐릭터와 그보다 더 멋진 주위의 여성들에게서 힘을 얻습니다.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