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즈&이어즈
인류가 멸망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이다. 다른 건 없어도 된다. 정말 그럴까?
<이어즈&이어즈>라는 사고실험을 지켜보면 알 수 있다. 6부작 영국 드라마 <이어즈&이어즈>는 <닥터 후> 시리즈 메인 작가 러셀 T. 데이비스의 신작으로, 2019년부터 15년간 한 가족과 한 사람의 정치인을 중심으로 영국 사회를 조망하는 기획이다.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형태의 주거가 일반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인 한국에서도 일일연속극이 종종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상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령, 성별, 성격, 직업, 출신지, 정치성향, 문화적 취향 등을 한 작품에서 다양하게 다룰 때 ‘교차점’으로 존재하는 가족만큼 자연스러운 클러스터는 없어보인다.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가 할아버지와 그의 젊은 이민자 아내에서 시작하는 3대를 중산층 가족의 삶이라는 형태로 그려보인다면, <이어즈 & 이어즈>는 혼자 사는 할머니와 그의 자손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가족만큼이나 '15년'이라는 시간이 주인공이 된다. 2019년부터 2034년까지, 역사가 기록할 이 시간은 비비언 록이라는 정치인이 미디어에서의 자극적인 언행을 통해 기업가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세월일 것이다.
영국판 트럼프라고 할 수 있을 이 인물은 황당하면서도 대중이 솔깃해할만한 공약을 내건다. 십대가 음란물에 노출되는 현상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유권자들 앞에서 유치원생들도 볼 수 있는 형태로 유통되는 음란물을 틀어주는 것이다. 그런 뒤 특정 지역에서는 아예 핸드폰 사용을 못하도록 만든다는 공약을 내건다. 카메라 앞에서 욕설은 기본이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인기 요인이다.
어떻게 비비안 록이 영국 총리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고 파멸하게 되는가를 알기 위해서 <이어즈&이어즈>가 살피는 것은 한 가족이다. 금융전문가이면서 아내 셀레스트, 딸 베서니와 살고 있는 스티븐 라이언은 금융위기로 가진 모든 걸 잃게 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배달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베서니는 트랜스 휴먼이 되고 싶어한다. 전자칩을 손가락에 이식하는 등 신체를 개조하려는 것. 이디스 라이언은 활동가로 일하는 중이며, 드라마 초반에 핵폭탄이 터질 때 그 근처에 있다가 피폭된다. 대니얼 라이언은 주택 관리원인데 동성 배우자가 있음에도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 빅토르와 사랑에 빠진다.
이 과정에서 경제 계급의 문제, 난민 문제, 로봇 시대의 섹스 문제 등이 차례로 끌려나온다. 가족은 항상 음성인식 비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서든 쉽게 음성통화를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실시간 업데이트한다. 후반부에서는 대니얼이 영국에서 추방당한 빅토르를 구하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사건과 외도를 계기로 가족의 분열이 시작된다.
한국에서는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이면 그리운 옛 이야기가 가족 파탄의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15년쯤 시간이 지나면 가족 중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이혼을 했고 누군가는 가족 몰래 엉뚱한 일을 꾸미다 철퇴를 맞는다. 그동안 정권은 몇 번 바뀌고 환경은 오염된다. 그래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있는 한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다. 정치인의 갱생 가능성은? 미래에도 없어보이지만.
이어즈&이어즈, 지금 볼까요?
이다혜 / 씨네21 기자
2000년부터 씨네21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책 읽기 좋은날』,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아무튼, 스릴러』를 썼어요. 50개 넘는 간행물, 30개 넘는 라디오에서 종횡무진 활동해 왔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