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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Jun 15. 2020

이상한 저택의 여자들

고스포드 파크(2001)



백작 부인, 할리우드 제작자, 배우, 전직 대령, 사업가들이 고스포드 파크로 모여든다. 저택의 주인 맥코들 경(마이클 갬본)이 주최하는 사냥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당도한 이들은 제각기 속내를 감추고 잇속을 챙기느라 여흥을 즐길 여유 따윈 없다. 헤렌드의 티 세트로 꾸며진 우아한 티타임에도 맥코들 경에게 한 푼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인다. 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영롱한 디너에서도 예민해진 이들은 서로를 깎아내리거나 신경을 건드리느라 대화다운 대화도 하지 못한다.ᅠ


오히려 정보를 교환하고 비밀의 퍼즐을 맞추며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쪽은 아래층의 사용인들이다. 주인들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그들의 지위대로 식사 자리를 정할 정도로 고용인들의 삶에 종속된 것으로 보이는 하인들은 누구보다 귀족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고상한 매너와 고급 취향으로 가리고 있지만 정작 이들은 돈 한 푼 제 능력으로 벌어보지 못했으며 도덕적 우위 또한 점하지 못한다. 신분보다 자본이 앞서는 1930년대는 맥코들 경처럼 성공한 자본가가 되면 얼마든지 귀족과 결혼해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입장한 상류 사회는 장인의 재산을 탕진한 남편이 아내를 냉대하고, 마주치는 족족 젊은 여자를 건드리는 한심한 족속들이 포진한 곳이지만 말이다.ᅠ


무엇보다 그들의 화려한 삶은 하인들이 없다면 단 한 시간도 유지되지 못한다. 우아한 척하지만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것은 없는 이들은 곁에 시종이나 하녀가 있지 않을 때는 카메라가 비춰주지도 않는다. 치장을 도와주지 않으면 저녁 식사 자리에도 나가지 못하고, 유일하게 고민을 나누는 대상도 고용인이다.ᅠ아래층의 노동력이 제공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위층의 세계는 살해당한 맥코들 경의 죽음으로 크게 흔들린다.ᅠ


만약 당신이 [다운튼 애비]의 시청자였으며 [나이브스 아웃]을 재미있게 봤다면 틀림없이 [고스포드 파크]도 마음에 들 것이다.ᅠ[고스포드 파크]의 각본으로 74회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줄리안 펠로우즈가 [다운튼 애비]의 제작과 각본을 맡았기에 고스포트 파크는 그랜섬 백작가 탄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저택 곳곳은 다운튼 애비를 빼다 박은 데다 그곳을 돌아가게 만드는 사용인들의 톱니바퀴 같은 움직임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랜섬이라는 백작가의 이름 또한 고스포드 파크에서 먼저 발견된다.ᅠ


영화에서는 결코 초대받고 싶지 않은 파티가 열리는 데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물들이 그득한 곳이지만 흥미로운 여성들만은 대거 등장한다.ᅠ한명 한명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즐거움이 대단한데,ᅠ앙상블 캐스팅과 연출의 대가라 불리는 로버트 알트먼 감독답다. [다운튼 애비]의 레이디 그랜섬이었던 메기 스미스는 여기서도 역시 그랜섬 백작부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맥코들 경에게 생활비를 요청하러 왔으면서도 자수성가한 배우와 제작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메기 스미스의 놀라운 지점은 이 와중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귀족의 허세를 결코 버릴 수 없는 노부인은 자신이 홀대하는 유산계급이 사용인들에게 제대로 당한 순간 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즐거워한다. 마치 [기생충]에서 기우네와 지하실 가족끼리의 싸움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지만 그 쓴맛 우러나는 비애와 별개로 천진한 백작 부인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 캐릭터를 바탕으로 [다운튼 애비]의 완고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고모님이 탄생했으리라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ᅠ


맥코들 경의 부인 실비아 역시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에 의해 뻔하지 않게 그려졌는데ᅠ남편이 죽었지만, 전혀 슬퍼하지 않고 앞날을 도모하는 부잣집 마님을 산뜻하게 제시한다.ᅠ그러나 누구보다도 시선을 사로잡고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인물은 윌슨 부인이다. 철저히 주인의 논리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이던 가정부에서 끔찍한 폭력의 생존자로 위엄을 발하기까지 헬렌 미렌은 자신이 지닌 여왕의 기품과 파워를 폭발시킨다.


1930년대 영국은ᅠ신분에 의한 계급이라는 것이 무색해지고, 자본이 새로운 족보로 자리 잡은ᅠ시기다.ᅠ부모 세대부터 대대로 시종, 하녀, 풋맨 등 귀족들의 수발을 들던 이들 역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고스포드 가에서 일하는 이들도 삶의 방향키를 다시 잡는다. 하녀장인 엘시(에밀리 왓슨)는 혈육이 위독해도 찾아갈 수 없는 처지에ᅠ“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없지?”라는 의문을 품고 마침내 저택을 떠난다. 


메리(켈리 맥도널드) 역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주인에게 예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데 그는ᅠ[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를 떠올리게 한다. 역시 아버지 할란(크리스토퍼 플러머)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가족들이 모인 트롬비 저택에서 할란의 유일한 친구였던 간병인 마르타는 선한 의지로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누명을 벗는다. 


그랜섬 백작부인의 시중을 드는 메리 역시 모두의 욕망이 충돌하는 고스포드 파크에서 찬찬히 주변을 관찰하고 곧은 심성으로 사건의 실체를 알아차린다.ᅠ윌슨 부인이 완벽한 하인의 가면을 쓰고ᅠ“내 삶은 없어”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지나 엘시와 메리는 삶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고자 한다. 


물론 그들의 앞날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의 죽음으로 파산을 면하게 되었다며 안도하는 이들보다 훨씬 좋은 인간으로 살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스포드 파크]를 보게 될 분들에게 드리는 이로운 스포일러 한 가지. 영화 초반부터 상당한 분량으로 등장하는 강아지는 살인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무사하니 안심하고 보시길.



고스포드 파크, 지금 볼까요?


이지혜 /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영화 속의 멋진 여성 캐릭터와 그보다 더 멋진 주위의 여성들에게서 힘을 얻습니다.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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